[산아정책 흑역사]국민소득 78달러 시대의 불가피한 선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5일 16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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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정책 흑역사 <1> 프롤로그
● 피임 장려에서 출산 장려로 대반전
● 男 정관수술 보험 적용 마지막 날 종일 ‘북적’
● 여성단체, ‘남성 피임의 해’ 선포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여기에 인구 고령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20년 전까지 만해도 인구가 많다며 ‘가족계획’을 권장했던 국가다. 지금은 ‘출산’을 장려하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정부의 산아정책. 이 아이러니한 ‘흑역사’를 연재한다. 필자인 이윤수 한국성과학연구소장은 과거 가족계획에 앞장섰던 대한가족계획협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정부의 계몽활동에 설득(?)당한 수많은 예비군의 아랫도리를 봉했던 정관수술 전문가. 최근에는 강연과 상담으로 출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관수술을 하러 오는 남성들에게 ‘재고’를 권한다. -편집자 》

6·25전쟁 당시 피난길에 지친 한 가족이 연합군이 배급한 급식을 먹고 있다.
6·25전쟁 당시 피난길에 지친 한 가족이 연합군이 배급한 급식을 먹고 있다.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인구가 넘쳐나 감당 못하는 중국과 인도를 보자. 인구가 많은 것보다 오히려 적은 게 좋은 건 아닐까. 과거 우리나라도 한동안 인구를 줄이려 노력한 적이 있다.

1960년 이전까지 우리 국민은 헐벗고 굶주렸다. ‘가난이 줄줄 흘렀다’는 말 그대로였다. 패망한 일제의 갖은 수탈이 끝나나 했더니 6·25전쟁으로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겐 ‘보릿고개’라는 말이 낯설 것이다. 어쩌면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되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라면 그 시절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얼마나 처절하게 살았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당시 정부는 먹고살 게 없으니 인구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끝내는 ‘가족계획’이라는 미명 하에 대책 없이 아이를 낳는 집을 단속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남성에게는 ‘정관수술’을 권장하고, 여성에게는 온갖 ‘피임시술’을 장려했다. 그래야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진다나?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정반대로 돌변해 저출산율이 국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며 출산 장려에 여념이 없다. 정말 ‘인구가 국력’이라는 말인가?

피난민촌 아이들. 남동생을 업고 식사준비를 하는 누나. 솥에 쌀 대신 마른 풀만 가득하다.
피난민촌 아이들. 남동생을 업고 식사준비를 하는 누나. 솥에 쌀 대신 마른 풀만 가득하다.

수술비 3만 원→30만 원!

정부의 산아정책사에서 2004년 11월 30일은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정부가 주도했던 ‘가족계획’ 사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족계획 사업에 종사했던 관계자들은 한순간에 국가와 민족 앞에 죄인(?)으로 전락했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남성 정관수술부터 막았다. 그동안 가족계획 사업이란 명목으로 국가가 정관수술비를 지원했다. 처음에는 직접 지원하다 어느 순간 건강의료보험으로 대체했다. 그러더니 아예 수술비 전액을 본인 부담으로 돌리겠다고 정반대로 선회한 것이다. 대신 정관복원수술에 대해선 의료보험 혜택을 받도록 했다. 정관을 끊는 건 막고 다시 잇는 건 적극 장려하는 것이다.

정관수술이 의료보험 적용을 받은 마지막 날인 11월 30일, 전국의 비뇨기과병원은 정관수술을 받으러 온 남성으로 온종일 북적였다. 당장 내일부터 보험혜택이 없어진다는 말에 그동안 수술을 망설이던 남성들이 병원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엔 의료보험 적용을 받아 수술비 8만460원 중 본인부담금이 3만원밖에 안 됐으나 보험대상에서 제외되면서 하루아침에 30만 원으로 10배가 뛰었기 때문.

서울 시내 한복판인 명동에 위치한 필자의 병원에도 주변 회사원이 몰려들었다. 평소 하루 한두 건이던 정관수술을 이날 하루에만 30건 넘게 했다. 예비군들을 대상으로 한꺼번에 수술할 때를 빼놓고 하루에 그토록 많은 정관을 자르기는 처음이었다.

비뇨기과의사들은 이런 날이 매일 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일 년 넘게 정관수술은 물론 문의전화조차 뚝 끊겼다. 정책이 또다시 바뀌면 좋으련만….

못사는 게 인구 탓?


정부가 전국 시·군·구 보건소에 설치한 가족계획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는 부부.
정부가 전국 시·군·구 보건소에 설치한 가족계획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는 부부.

1960년부터 시작한 가족계획사업은 사실 불가피한 면이 있다. 산업구조라야 대부분 농업이었고, 2차 산업의 존재는 미미했다. 1인당 국민소득(GNI)은 78달러. 세계 최하위 국가군으로 분류됐다. 같은 시기 미국의 GNI가 2250달러, 캐나다 1521달러, 프랑스 900달러, 일본 299달러 등이었던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한 신문 사설 제목이 이랬다.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알자’. 우리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기아와 빈곤 해결. 그 대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가족계획이었다.

1955~1960년 우리나라의 인구 증가율은 약 3%. 다른 선진국에 비해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정부는 인구 억제 정책을 민간주로로 추진하기 위해 1961년 4월 1일 대한가족계획협회를 발족했다. 당시 대한가족계획협회 설립취지문 중 일부다.

‘가족계획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임신횟수 및 터울을 조절함으로서 도의적으로나 모성 건강을 위해 좋지 못한 임신중절을 피하고 원치 않는 수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태어난 자녀에 대해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잘 양육하게 함으로써 적절한 자녀수를 유지하고 명랑하고 윤택한 가정생활을 이룩하고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을 도모함에 있다.’

협회는 한 달 뒤 발생한 5·16 군사정변으로 잠시 문을 닫았다가 바로 다시 열고 6월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에 가입했다. 당시 정부나 지식인들은 가구당 가족 수가 너무 많다보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봤다. 나아가 국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1961년 11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인구 억제정책을 병행하기로 했다.

정부는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알리려 대대적인 국민 계몽활동부터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62년 3월 1일 전국 시·군·구 보건소에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했다. 또 시골 구석구석까지 계몽지도원을 배치하고, 콘돔, 질내 삽입 피임정제, 피임약, 젤리 등을 무료로 보급하기위해 예산을 집중 편성했다.
대한가족계획협회가 만든 어머니회에서 주부들을 모아놓고 가족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한가족계획협회가 만든 어머니회에서 주부들을 모아놓고 가족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한가족계획협회는 1964년 4월부터 의사들에게 정관절제수술교육 및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정관수술비는 500원. 정부는 남성들의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으며 정관수술을 장려했다. 수술을 받은 남성에게 사후 치료비는 물론 회복기간 중 근로보상금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했다. 수술대상자에게 수술을 받게 한 보건지도원이나 계몽원에게는 별도 활동비를 지급했다. 심지어 정관수술 부작용 치료를 위한 ‘피임시술 사후 관리위원회’를 중앙 및 지방에 설치해 운영했다.


‘남성이 더 피임하는 해’


여성에게는 자궁 내 장치인 ‘루프 삽입시술’을 권장했다. 루프는 한번 시술로 제거하기 전까지는 피임효과가 지속돼 효과적이지만,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부작용 등으로 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1968년부터 루프 시술에 실패한 여성에게는 먹는 피임약을 제공했다. 이 피임약은 스웨덴이 무상원조한 것이다.

여성의 영구 피임방법 중 나팔관 절개 수술은 개복을 해야 할 정도로 큰 수술이었다. 때문에 제왕절개수술 등 개복수술을 한 사람 중 희망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시술이 이뤄졌다.

1976년 이후 일명 ‘배꼽수술’로 불린 복강경 수술법 등 한층 수월한 방식이 보급되면서 수술 건수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골반이나 허리 통증 등 수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여성의 난관수술은 남성의 정관수술보다 훨씬 어렵고 부작용이 심각한데도 정관수술보다 훨씬 많이 이뤄졌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단체들은 대한가족계획협회와 손잡고 '남성이 더 피임하는 해'를 선포하기도 했다.

이윤수 한국성과학연구소장 이윤수·조성완 비뇨기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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