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61>리듬과 강밀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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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팔자’란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엇박’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담론과 가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다양성과 자율성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 덕분에 남성성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권위가 해체되고 생태주의, 여성성, 로컬리즘 등의 가치가 널리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형식적 차원을 넘어 내용적 실상에서 보자면 그 성과가 실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다양성은 산만함 아니면 중독증과 헷갈리고, 자율성은 나태 혹은 이기심과 구별되지 않는다. 요컨대 기존의 가치와 결별했다고 해서 그 즉시 새로운 길이 열리는 건 아니다. 그건 단지 시작일 뿐이다. 시작이 있으면 중간이 있고, 그 다음엔 끝이 있다. 시작과 중간과 끝. 시간적 순서(차)는 반드시 공간적 질서(서)와 함께한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시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공간의 ‘휘어짐’이고 공간은 시간의 ‘주름’이다. 시공간의 리듬, 그것이 곧 ‘차서(次序)’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에는 차서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차서가. 해마다 이 리듬을 밟기 때문에 우주는 쉬지 않고 만물을 창조해 낸다. 이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활동을 일러 순환이라 한다. 순환이야말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다양성과 자율성도 이 차서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컨대 시작할 때는 봄의 기운을 타야 한다, 봄은 살리는 기운이다. 얼어붙은 땅 위에 만물이 소생한다. 이 소생의 출발은 씨앗이다. 씨앗은 내적인 응축력이다. 그러니까 처음 시작할 때는 열정이든 분노든 안으로 충분히 응축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곧바로 화려하게 발산하고자 한다. 봄을 건너뛰고 바로 여름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다. 여름은 화려하다. 안으로 응축했던 열정들이 다 밖으로 분출되는 단계다. 그래서 속은 비어 버린다. 속 빈 강정! 외양은 비대해지고 명성은 높아지지만 내적 성장과 고양은 멈춰 버린 단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 와중에 입추가 온다. 가을은 우주의 ‘대혁명’이다. 혁명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열매를 위해 잎을 버리듯, 기존의 성취를 과감하게 비우고 그 비움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겨울의 적막과 침묵을 견뎌 낼 수 있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마디다. 모든 활동과 관계는 이런 차서를 밟게 되어 있다. 사랑도 일도 조직도. 이런 차서를 건너뛰려 한다면 모든 스텝은 다 꼬이고 말 것이다. 봄에 여름을 생각하고, 또 겨울엔 봄을 기다리고. 결국 단 한번도 자신의 삶을 직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반복되면 소위 ‘팔자’가 된다. 팔자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엇박’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스텝이 꼬이면 강밀도(intensity) 역시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강밀도는 각각의 리듬에 변화와 개성을 부여하는 진동이다. 그 기준은 청정함이다. 청정하다는 건 말과 행동, 명분과 실상, 앎과 삶 사이의 간극이 없음을 의미한다. 간극이 없어야 다음 스텝으로 경쾌하게 넘어갈 수 있다. 이것이 곧 자율성이다. 자율성이란 발산과 수렴을 스스로 조율하는 힘과 다름없다. 다양성의 시공간이 열리는 것도 그 속에서다. 고로 인생과 우주의 원칙은 간단하다. 리듬을 타고 강밀도를 높여라!

고미숙 고전평론가
#팔자#리듬#강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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