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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대신… 개성 ‘여성 4인방’ 3·1운동 선봉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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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대신… 개성 ‘여성 4인방’ 3·1운동 선봉에 섰다

안영배 기자 입력 2018-10-06 03:00수정 2018-10-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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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7화> 개성-‘8호 여감방’

시간을 거슬러 99년 전인 1919년 10월 초, 추석을 며칠 앞둔 경성(서울) 서대문감옥의 여옥사 8호 감방은 벌써 한겨울로 접어들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바닥은 빙판처럼 차가웠고 몸은 오슬오슬 떨렸다. 일여덟 명의 독립만세운동 ‘여전사’는 감방에서 추위를 이기려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개성(당시 경기도 소속)에서 3·1항쟁을 주도한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수원에서 기생 만세운동을 일으킨 김향화, 천안 아우내장터(현 병천)의 만세운동으로 공주감옥에 수감됐다가 8월에 이감돼 온 유관순 등이 바로 그들. 8호 여감방생들은 가족과 한가위를 즐기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해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그새 또 사람이 늘어났다. 경기 파주 지역 3·1항쟁을 이끈 구세군 사령 부인 임명애가 출산이 임박해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출산 한 달 만인 11월에 신생아와 함께 감방으로 돌아왔다. 신생아도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은 남편(염규호)마저 투옥 중이어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점점 매섭게 추워져 기저귀가 마르지 않아 아이의 대소변을 해결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감방 시설은 극도로 열악했다. 냉난방은 고사하고 별도 화장실이 없어 수감자들은 나무로 만든 통에다 볼일을 해결했다. 급식은 더 형편없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콩밥 한 덩이와 배추 몇 조각이 둥둥 떠 있는 소금국, 무장아찌 두어 쪽이 전부. 끼니는 개인별 형량과 노역 강도에 따라 9등급으로 차등을 두어 배급됐으나 늘 양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8호 감방생들은 자신이 먹을 음식을 조금씩 덜어 영양 부족에 시달리는 산모와 신생아를 챙겨주곤 했다.

8호 감방생들의 신분은 다양했다. 여학생(유관순), 교사(권애라), 기생(김향화), 시각장애인(심명철), 출산부(임영애), 교회 ‘전도부인’(여성 전도사·어윤희, 신관빈) 등 제각각이었지만 모두들 3·1항쟁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으로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노래로 수감 생활의 고통을 달래기도 했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유관순의 선배인 권애라는 스물두 살 동갑내기인 기생 김향화에게 저녁마다 ‘개성 난봉가’나 ‘평양 수심가’ 등 노래를 배웠다. 김향화는 권애라로부터 서양 가곡을 배우면서 서로 의지했다. 노래 실력이 “기생 웃길 간다”(기생보다 잘한다는 뜻)는 칭찬까지 들은 권애라는 신분과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신여성이었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그는 왼팔 겨드랑이 안쪽에 태극 문양 문신을 새겨 넣을 정도로 열혈 애국지사였다.

감방이라고 해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멈춰진 것은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1920년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이 다가오자 8호 감방생들은 또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맏언니이자 감방장인 어윤희(1881∼1961, 당시 38세)를 중심으로 감방 동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벽을 두들겨 암호화한 신호를 주고받는 ‘통방’, 즉 타벽통보법을 통해 옆방의 동료들과 정보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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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옥사는 2개 동에 모두 17개의 감방이 갖춰져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주로 구치감(미결감)으로 사용되던 여옥사 8호 감방 옆으로는 비밀결사체 대동단의 여성 대표를 맡아 독립운동을 한 이신애, 유관순의 스승인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 정신여학교 학생 이아주 등이 수감돼 있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1시경, 여옥사는 물론이고 서대문감옥 전체가 순식간에 독립만세 현장으로 바뀌었다. 일반 잡범까지 포함해 300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동시에 변기 뚜껑으로 철판을 두드리고 문짝을 발길질하는 행동으로 서대문감옥은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옥사 8호 감방은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무장한 여성 투사들로 인해 ‘옥중 투쟁본부’라는 별칭도 붙여졌다.(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복원된 여옥사. 3·1운동의 여성 주역들이 주로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개성의 여장부 ‘어부인’

9월 추석 연휴에 기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여옥사 8호 감방을 찾았다. 청명한 가을 날씨임에도 복원된 여옥사의 모습은 을씨년스러웠다. 여옥사에는 당시 수감됐던 인물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남성 못지않게 치열했던 여성들의 독립운동사가 이곳에 압축돼 있는 듯했다.

8호 감방생 중 개성 지역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서대문감옥의 수감자들은 민족대표 48인을 비롯해 3·1항쟁이 발생한 지역에서 주동적 역할을 한 남성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 한 군데, 개성만은 예외였다. 거사 준비와 진행이 모두 여성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고 만세운동의 주역들이 여옥사 8호 감방에 함께 수감됐던 것.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60km 남짓한 개성은 교회 조직을 통해 일찌감치 경성의 3·1운동 계획을 접하고 있었다. 33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인 오화영 목사가 보낸 독립선언서가 2월 말 이미 개성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개성에 연고를 둔 오화영마저 “개성에서는 너무나 일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선언서도 조금만 보내겠다”(‘이만규 신문조서’)고 한탄할 정도로 독립만세운동 열기는 식어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대중에게 배포하겠다고 나서는 남성들도 없었다. 심지어 ‘불온한’ 독립선언서 보관마저 저마다 떠넘기는 바람에 교회 예배당 지하 어두운 곳에 방치돼 있다시피 했다.

이때 ‘어부인’이라고도 불리던 어윤희가 나섰다. 그는 독립선언서 배포와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흔쾌히 자청했다. 남편이 동학군으로 출전했다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바람에 열여섯 살 소녀 과부가 된 어윤희는 34세 때 개성 미리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이후 교회 전도부인으로 활동해온 여장부였다.

그는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과 함께 교회의 부인들, 호수돈여학교와 미리흠여학교 학생들을 규합해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만세운동도 못 하는 ‘부끄러운 도시’가 될 뻔했던 개성은 어윤희에 의해 겨우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됐다.(박용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여성운동’ 편)

거사는 경성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맞춘 3월 1일 오후 2시. 어윤희 등은 읍내 만월정(滿月町), 북본정(北本町), 동본정(東本町)의 각 거리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당당하게 팔에 걸고 배포하면서 3·1항쟁의 시작을 알렸다.(‘경성지방법원판결문’, 1919년 4월 11일)

여성들의 주도로 시작된 3·1항쟁은 처음 예상과 달리 개성 장안을 애국적 열기로 들끓게 했다. 어윤희 등의 애국 행동을 지켜본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미리 자퇴서를 학교에 써내놓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결사대까지 조직했다. 미리흠여학교 출신의 시각장애인 심명철은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 대열에 서서 열변을 토했다.(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15, 16세 이하의 소학교 생도들로 구성된 소년대 수백 명도 선죽교에서부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수천 명 군중이 합세해 일인(日人) 집에 게양된 일장기를 찢어버리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일제 파출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등 과격한 시위도 감행했다.(이병헌, ‘3·1운동비사’)

이후 어윤희 등 4명은 주동자로 지목돼 일제 경찰에 연행됐다. 어윤희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끌려가 신문을 받으면서도 의기를 굽히지 않았다. “저 앙큼한 년을 봐라! 다 알고 있는데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저 년을 발가벗겨라” 하고 호통치는 검사에게 어윤희는 “내 몸에 누가 손을 대느냐? 발가벗은 내 몸뚱이를 보기가 그렇게 소원이거든 내 손으로 옷을 벗으리다” 하고는 옷을 훌훌 벗어버렸다.

“자, 실컷 보시오. 당신 어머니도 나 같을 거고 당신 부인도 나와 같을 거요.”

어윤희의 서슬 퍼런 소리에 검사가 오히려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심명철은 “장애인이 무슨 독립만세운동을 하느냐”는 추궁에 “내 눈이 멀었다고 내 마음도 먼 줄 아느냐!”며 당당하게 맞섰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3·1운동에 앞장선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전으로 이전해 호수돈여고로 개교했다. 동아일보DB



○ 실패로 돌아간 여성 ‘황국신민화’

일제는 개성과 수원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서 여성들이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특히 어린 10대 여학생들까지 참여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개성―여학생이 시작’ ‘평양―여학생이 만세’ ‘고양―여학생을 꼬여’ ‘부산―여학생의 음모’ 등 기사로 여학생들의 만세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3·1항쟁에서 여학생들의 활약은 일제 식민지 교육정책의 실패를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여성 정책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썼다. 1907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을 용이하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부녀자들을 허물어뜨려야 한다는 지침을 내린 이후, 일제 총독부 관리들은 여성들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주력했다. 무조건 복종형 교육으로 길러진 여성들을 통해 그 자녀들은 저절로 일본의 충량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으며, 조선인의 민족정신도 자연스럽게 말살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일제는 이런 교육정책으로 의도하는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3·1항쟁에서 여학생들은 일제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오히려 여성들은 일경의 강경 진압으로 남성들이 만세운동을 멈칫거릴 때마다 먼저 나서서 시위를 주도할 정도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서울의 공립 여고보 학생들이 거리의 군중 가운데서 용감하고도 눈에 잘 띄는 지도자들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Korean Independence Outbreak Beginning March 1st, 1919’, 서양인 선교사들이 작성한 3·1운동 발발 보고서)

일제는 여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세 시위에 나선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학생들을 검거하고 신문하면서 배후 조종자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체포된 여학생들을 발가벗긴 채 기절하도록 때리고, 깨어나면 세워놓은 거울 앞에서 고양이처럼 기어가게 하기도 하고, 찬물 끼얹기와 인두 담금질을 번갈아 하기도 했으며, 음모(陰毛)를 뜯어내는 등의 비인간적인 악행을 가했다.(‘北京 데일리뉴스’ 1919년 4월의 보도 기사 발췌)

여학생들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 김정애(당시 14세)는 당당하게 말했다.

“일본 사람들은 어른만 애국심이 있고 아이들은 애국심이 없는 식충이들만 산다는 이야긴가요. 조선 사람은 삼척동자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 우리들은 벌써 14, 15세의 장성한 처녀들이에요.”(최은희, ‘한국근대여성사’)

한국 여성들의 독립만세운동은 외국 언론과 선교사들을 통해 해외에도 알려졌다.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에 저항한 민족운동가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당시 16세의 딸 인디라 간디(1917∼1984)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민족은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며 특히 여성들의 활약을 강조했다.

“일본인이 한민족을 억압한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쓰라린 암흑의 일막이다. 코리아에서는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안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세계사 편력’)

실제로 여성들은 3·1항쟁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됐다. 여학생의 경우 경성 시내 소재 10개 여학교의 학생(1929명) 중 99.8%(1926명)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경성 시내 여학교 만세사건 보고공판 개황, 1919∼1929년). 또 1919년 한 해에 전개된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여성은 471명에 이르렀다(조선총독부 법무국 자료). 당시 사회적 연약 계층으로 취급받던 여성들이 참여한 3·1독립만세운동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 ‘남녀노소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명문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최초의 남녀평등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1운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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