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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兒들이 독립운동한다고?… 2·8선언, 마침내 국내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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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兒들이 독립운동한다고?… 2·8선언, 마침내 국내점화

안영배 기자 입력 2018-03-10 03:00수정 2018-04-0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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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제2화> 2·8 거사
1919년 초,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 도쿄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은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들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여러 차례 유학생활을 한 춘원 이광수는 1910년대 중반의 유학생들은 세 부류가 있다고 했다.

“첫째 세계 대세와 현대문명을 일부분은 이해하고 또 전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둘째 세계와 현대문명을 모르고 관리로 출세할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 셋째 남이 유학하니 나도 유학한다고 하는 사람이었다.”(이광수, ‘동경잡신·東京雜信’)

잃어버린 국권 회복을 부르짖으며 비분강개하는 도쿄 유학생은 소수였다는 얘기다. 그런 기류가 1917년 제정러시아 붕괴, 1918년 초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을 포함하는 평화원칙 14개조 주창 등을 계기로 확연히 달라졌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도쿄 유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한국독립의 서광이 비친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비판적 견해도 만만찮았다. 2·8독립선언 11인 중 한 명인 서춘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의 독립을 전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웅변회(1918년 11월 22일)에서 “만일 미국의 주의(主義)가 참으로 정의인도(正義人道), 자유평등(自由平等)한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개인 간에 있어서는 정의인도, 자유평등을 대등하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국가로서 단체로서 실력이 없다면 하등 소득이 없는 말이다”고 역설했다.(강덕상, ‘현대사사료·조선2’)

다만 도쿄 유학생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독립운동의 호재 혹은 방편으로 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만 가지고서는 적국(敵國)의 한복판에서 거사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 국내에 파견된 유학생 밀사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중앙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의 숙직실. 학교 설립자 김성수, 중앙학교장 송진우, 교사 현상윤 등이 3·1운동 거사를 모의한 곳이기도 하다. 동아일보DB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를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 일본에 잠입한 요원 장덕수는 유학생 대표 중 한 명이자 동갑내기인 김도연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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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다같이 호응해야 할 것이다. 상하이의 대한청년독립단(신한청년당)과 연결 관계를 가지고 해내(海內) 해외(海外)가 일치하게 거사함이 좋을 것이다.”(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장덕수는 비밀 독립운동기관 동제사의 청년 요원을 중심으로 설립한 신한청년당의 움직임을 설명하며, 도쿄 유학생들도 국내와 호흡을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거사 자금도 국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장덕수는 일본으로 잠입하기 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의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내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가 안희제를 찾아가 상하이의 동정을 알리고 2000원을 받았던 것.(이경남, ‘설산 장덕수’) 이와 별도로 동제사 요원이자 신한청년당원 선우혁(1882∼?) 역시 중앙학교 설립자 김성수로부터 1000여 원을 전달받아 파리강화회의 활동비로 쓸 수 있었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당시 도쿄 유학생들의 한 달 치 생활비가 평균 20원인 점을 감안하면 모두 상당한 거금이었다.

유학생 대표들도 국내와 연결망을 구축했다. 와세다대생 송계백(2·8운동 후 체포돼 옥사)을 경성(서울)에 파견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려주어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한편으로 거사를 추진할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초중순경 비단 수건 위에 잔글씨로 쓴 독립선언서 초안을 사각모 안에 감추어 경성 북촌에 있는 중앙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로 찾아갔다. 보성학교 1년 선배이자 와세다대 선배인 현상윤(1950년 납북)이 중앙학교 교원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앙학교는 ‘불령선인(不逞鮮人·불량한 조선사람)’의 집결지였다. 배일(排日)사상을 가진 사람들만이 들락날락했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또 학교를 창설한 김성수와 교장 송진우, 그리고 교사 현상윤은 거의 날마다 학교 숙직실에 모여 세계가 개조되는 기운을 맞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견을 교환했다.(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

중앙학교 외에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라는 세계 정세를 이용해 거사를 도모해야 한다는 논의는 곳곳에서 일고 있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도태는 “독립을 꿈꾸는 한국인치고 이러한 세계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는 없었다”(동아일보 기고, 1946년 3월 5일자)고 밝혔다.

그때 도쿄의 유학생 후배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현상윤을 찾아온 것이다. 현상윤은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즉시 선언서를 송진우와 최남선에게 보였다. 현상윤은 이어 은사인 최린(보성학교 교장)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보여 주고, 그를 통해 당시 국내 최고 교세를 자랑하던 천도교 수장 손병희에게도 전달했다.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를 받아본 손병희가 말했다.

“어린 아(兒)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 하니 우리로서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느냐.”(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손병희는 그 이튿날로 천도교 최고간부회의를 열어 토의를 하고 천도교의 궐기를 결정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의 불꽃이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송계백은 국내 종교계가 단합해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는 답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도쿄로 귀환했다. 그의 손에는 도쿄 유학 선배인 정노식이 전답을 판 돈 3000원(현상윤 증언)을 비롯해 송진우 등이 마련해준 거사 자금도 쥐여져 있었다. 이 돈은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등을 제작, 인쇄, 배포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됐다.

○ 2월 8일, 그날

2월 8일 오전 10시 유학생 대표들은 도쿄 시내에 위치한 각국 대사와 공사, 일본 각 대신,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 그리고 국내외 신문잡지사 및 학교 앞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우편으로 부쳤다.

음산하리만큼 흐린 날씨였다. 오후 2시 회합이 시작될 때부터는 기상이 변했다. 도쿄에서는 자주 볼 수 없던 눈이 펑펑 내렸다. 학우회의 결산 총회를 구실로 소집한 모임 역시 때맞추어 독립운동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낌새를 눈치 챘는지 일본 경시청에서 보낸 경찰 4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강당 안에도 사복 경찰이 섞여 있다는 것쯤은 알려진 비밀이었다.

강당은 일찌감치 600여 명의 학생이 모여들어 앉을 자리가 없었다. 결행 시간이 되자 학우회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에 앉아 있던 최팔용이 “회장! 긴급 동의요” 하면서 단상으로 올라가서는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여기저기서 “좋소” 하면서 만장일치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팔용은 재빨리 백관수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케 했다.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血戰)을 선언하노라.”

선언서 구절을 읽는 백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로 이어 김도연에게 결의문을 읽게 했다. 결의문 한 구절마다 학생은 환성과 우레 같은 박수로 응답했다. 일부 학생들은 망국의 한이 북받쳐 대성통곡을 했다.

최팔용 등 유학생 대표들이 활판 인쇄된 조선독립선언서를 단상에 걸고 실행 방법을 발표했다. 이로써 확실히 독립선언서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어 유학생 대표들은 준비해둔 태극기를 챙기고 도쿄 번화가로 나가 시가행진에 들어가려 했다. ‘기습을 당한’ 형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단상에 나타나 해산을 명령했다.

학생들은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강당 안 접이용 의자를 경찰에게 던지며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사복 경찰들이 물밀 듯 들이닥쳐 학생들을 잡아 팔을 비틀어 질질 끌고 갔다. 상하이로 거사 진행을 알리기 위해 떠난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의 서명 위원을 비롯해 30명가량이 체포됐다.(위 내용은 2월 8일 당시를 기술한 김도연, 최승만의 회고록 참고)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학생들은 전원 체포됐다. 체포된 학생들은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이들을 내란죄로 기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한국에서 3·1운동 봉기가 시작돼 여론에 밀린 일제 재판부는 출판법 위반 등의 금고형(7∼9개월)을 선고했다. 2·8선언으로 희생을 치른 유학생들에게 3·1운동이 국민적 지지로 호응을 한 것이다.

도쿄 유학생들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독립선언운동은 성공했다. 유학생들이 가장 우려했던 사전 발각은 없었다. 2개월에 걸쳐 준비한 거사가 탄로 나지 않은 것은 철저한 기밀 유지와 대다수 도쿄 유학생들의 뜨거운 독립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학비가 어려운 사람 중에는 돈 몇 푼에 팔려 스파이 노릇을 하고 지내는 사람도 많았다”(최승만, ‘나의 회고록’)고 했지만 거사 당일까지 누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시위는 아시아 최초이기도 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동유럽, 아프리카, 동남아 등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을 자극했으나,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독립의 봉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재일 한국 청년 학생들이었다.(박경식, ‘일본에서의 3·1독립운동’) 이들의 봉기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 2차 2·8독립선언의 현장

2차 2·8독립선언 거사의 현장인 도쿄 히비야 공원. 도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기자는 2·8독립선언의 또 다른 현장인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을 찾았다. 일본 왕실의 상징인 왕궁과 제국의회 의사당, 유학생들을 감시하던 일본 경시청과 검찰청이 지척에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1차 시위로 붙잡혀간 이들에 이어 2차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사실 유학생 대표들은 2·8독립선언 후 모두 경찰에 끌려갈 것을 예상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7일, 2·8선언의 작전본부였던 백관수의 자취방(도쓰카초·戶塚町)에 유학생들이 모였다. 백관수가 말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내일 다 붙들려 갈 것이고 언제 다시 나오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여러분들은 우리의 뒤를 이어 일을 잘 해 달라.”(최승만, ‘나의 회고록’)

이렇게 해서 재궐기를 주도할 2차 활동자까지 선정됐다. 최원순, 정대호, 변희용, 강종섭, 최재우, 장인환, 최승만 등이 바로 그들. 이들은 2·8운동 사나흘 후 히비야 공원 광장에서 전유학생대회를 열었다. 1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이달(1907∼1942)을 후임 회장으로 선출한 뒤, 일본의 무단정치를 규탄하고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2월 12일 이 자리에 다시 모여 2차로 조선독립을 선포하는 선전문(조선독립촉진문)을 발표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어 23일에도 대표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해 히비야 공원에서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도중에 붙잡혔다.

이처럼 유학생들은 일본 왕실과 일본 통치기관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위를 벌이고자 했다. 전 세계에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체포를 각오한 시위였다. 그러나 히비야 공원 어디서도 독립만세운동을 했다는 흔적도 표시도 없었다. 그저 무관심 속에 묻혀져 가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현장이었다.

도쿄 유학생들은 도쿄에서의 시위가 어려워지고 조국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국내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대거 귀국했다. 이 기간 일본에서 귀국한 한국인 491명 가운데 유학생만 359명이었을 정도다.(‘朝鮮人槪況·在日本朝鮮人關係資料集成’)

도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독립운동#2·8선언#3·1운동#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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