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출정식’ 고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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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21>
21화: 이순신의 노량해전

남해군 ‘이충무공 전몰유허’(아래)에서 바라본 관음포 바다. 이순신의 순국 현장이다. 남해=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남해군 ‘이충무공 전몰유허’(아래)에서 바라본 관음포 바다. 이순신의 순국 현장이다. 남해=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598년 11월 18일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 이순신은 광양만 바다의 대장선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오늘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하늘은 반드시 왜적을 섬멸시켜 주시기를 원하나이다.”(‘연려실기술’)

이순신은 평소 “나는 적이 물러가는 그날에 죽는다면 아무런 유감도 없다”고 말했다.(유형의 ‘行狀’) 바로 그날이 다가왔음을 이순신은 직감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해 두 달(9∼10월)에 걸친 왜교성(순천왜성) 전투 후 일본으로 도망치려는 왜군을 섬멸하는 것이 이순신에게 남은 마지막 복수의 기회였다. 조명(朝明) 연합군은 철군 명령을 받은 조선 주둔 왜군들을 응징하기 위해 사로병진(四路竝進·네 개 방면에서 동시 진군) 전략을 펼쳤으나 동로군(東路軍)과 중로군(中路軍)은 모두 실패했다. 마지막 남은 서로군(西路軍·총사령관 유정)과 수로군(水路軍·총사령관 진린)의 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 군) 합동 공략마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이순신 수군의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육지의 명군은 왜군과 철수를 전제로 한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유정은 고니시의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고자 했으나, 바다의 이순신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해상길을 봉쇄해버렸다. 이에 사천왜성, 남해왜성, 고성왜성 등의 왜군들이 합세해 300여 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노량해협에 출현했다.(‘선조실록’) 이순신은 왜교성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원하려는 왜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에 출정식을 고한 것이다.

그렇게 이순신이 축원을 마치자마자 문득 큰 별이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이충무공신도비명’)

조선의 운명을 바꾼 혈투

이순신의 결연한 의지에 감복한 진린은 조명(朝明)수군 합동으로 출전했다. 밤 10시경 이순신과 명군 부장 등자룡이 좌우 선봉을 서고, 진린은 그 뒤를 따랐다. 맞은편으로는 노량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왜군 함대에서 먼저 조총이 불을 뿜었다. 선봉의 조선 군사들이 총에 쓰러지면서 전투는 시작됐다.(‘은봉전서’)

“한번 바라 소리가 울리니 포와 북 소리가 겸하여 진동했다. 조선군과 명군이 좌우에서 엄습하니 화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이 마구 날아다녀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형세를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난중잡록’)

조명 연합함대는 처음부터 북서풍을 이용한 신화(薪火)와 화전(火箭)으로 화공(火攻)을 펴면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광양만의 밤바다는 거센 북서풍을 타고 날아다니는 불꽃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적선 10여 척을 불태우고, 명 장수 계금이 직접 왜군 7명을 참살하는 등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궁지로 몰았다.

이순신과 진린은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이 오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서로를 구원했다. 진린의 배가 세 겹으로 포위되고 왜군이 배에 올라 칼을 휘두를 때 이순신이 왜군 대장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왜군의 포위를 풀어 진린을 구출했다. 이 와중에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참전한 등자룡 장군은 배를 빼앗기고 왜군에게 살해됐다. 왜군은 등자룡의 목을 베어 수급까지 챙겨갔다. 한편 이순신의 배가 적을 쫓아 적 함열 깊이 돌진하면서 왜선에게 포위되자 진린의 배가 급히 달려와 대포와 활로 왜선을 물리치기도 했다.(‘이충무공전서’ 부록5 紀實 上)

동이 트기 전, 큰 피해를 입은 왜군 함대는 퇴로를 찾던 중 관음포 내항으로 이동했다. 남해섬을 돌아나가는 외해(外海)로 오인해 들어갔다가 만에 갇힌 상황이 돼버렸다. 독 안에 가둬놓고 섬멸하려는 쪽과 생사를 걸고 빠져나가려는 쪽의 전투는 혈전으로 이어졌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해 일제히 쏘았다. 이순신이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급히 장좌(將佐)에게 명해 방패로 신체를 지탱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비밀로 하여 발상(發喪)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그 아들 이회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렀다.”(‘난중잡록’)

이순신은 휘하 군관 송희립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일어서다가 자신도 겨드랑이 밑에 총탄을 맞았던 것이다.(‘은봉전서’)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죽음 앞에서도 오로지 싸움의 결말을 걱정하는 이순신의 유명을 받은 장자 회와 조카 완 등은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전투를 끝까지 수행했다. 이순신이 죽음으로 바꾼 전투의 결과는 찬란했다.

11월 19일 정오경, 왜군은 참패했다. 명군의 보고에 의하면 왜군 전선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선조실록’) 사천왜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타고 있던 어립선(御立船)이 파손돼 겨우 다른 왜선에 구출됐다.(‘정한록’)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겨우 50여 척에 불과했다. 관음포 앞바다는 왜군의 시체, 부서진 배의 나무판자, 무기나 의복 등이 온통 수면을 뒤덮었고 바닷물은 붉었다.(‘선조실록’)

전투가 마무리되자 “통제공은 어서 나오시오”하며 진린이 소리쳤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던 진린은 그러나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고 뒹굴며 큰 소리로 통곡했다.(‘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의 주검 앞에서 조선군과 명군의 뱃전에서 흘러나오는 통곡 소리는 바다를 진동시켰다. 곧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육지로 퍼져나갔다. 남도의 백성들은 먼 길을 내달려 쫓아와 골목을 메우고 통곡하였고, 시장을 보던 사람들은 술자리를 파하였다. 이순신의 상여가 돌아오자 남도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노인과 어린이들도 길을 막고 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이순신의 전공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던 선조도 “해상에서의 승리는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이는 조금 위안도 되고 분도 풀린다”고 좋아했다.

기자는 이순신이 순국한 남해군 관음포의 첨망대에 올랐다.

노량해전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인근의 순천시, 광양시, 여수시가 빙 둘러싸고 있는 광양만 해역이다. 왜교성은 서쪽 바닷길로 불과 20여 km 떨어져 있다. 노량해전은 왜교성 전투와 바로 이어지는 싸움이었다. 왜교성 앞바다에서 시작해 노량해협의 전투로 마무리되는 ‘광양만 해전’이 두 달여에 걸쳐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노량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결말짓게 해 준 전투였다. 일본이 정유재란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 또한 바로 노량의 전투다. 이순신이 죽음 앞에서도 전쟁 결과에 무섭게 집착한 것도 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겠다는 책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왕묘, 韓中을 잇는 420년 인연

이순신의 유해가 83일간 안치됐던 완도군 고금도의 월송대(왼쪽). 월송대 아래쪽의 고금도충무사에 있는 관왕묘비. 고금도=박영철 기자
이순신의 유해가 83일간 안치됐던 완도군 고금도의 월송대(왼쪽). 월송대 아래쪽의 고금도충무사에 있는 관왕묘비. 고금도=박영철 기자
노량해협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은 관음포구 이락사에 잠시 안치됐다가 며칠 후 고금도 월송대로 모셔졌다. 이순신의 시신이 안치된 월송대 터는 아직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보니 마치 이순신의 한이 어려 있는 듯했다.

월송대 아래쪽에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고금도충무사(사적 114호)가 있다. 사당 왼쪽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조선수군과 합류하러 고금도로 온 명의 도독 진린과 유격 계금이 이 자리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는데, 뒷날 이 자리에 충무사를 지으면서 관왕묘 묘비(廟碑)만 남겨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충무사는 정유재란 시절 명 수군이 주둔하던 군영이었고, 이순신의 수군은 그 건너편 덕동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관왕묘는 중국인들이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는 관우를 받들어 왜군들과 싸우는 명군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성한 사당이다. 명군 장수들과 병사들은 출전 전 관우의 영험을 받아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관왕묘는 가운데 군신 관왕을 모신 정전을 중심으로 동무(東廡)에는 진린과 등자룡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을 배향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 때 항왜(降倭) 유적이라는 이유로 파손됐다가 광복 후인 1959년 충무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새로 충무사로 재건하면서 정전에 이순신 초상, 동무에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장군을 배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완도군에서는 고금도 관왕묘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관왕묘는 조선의 이순신과 명의 진린이 무장(武將)으로서 생사를 초월한 인연을 맺었던 곳임을 추념하는 의미가 있다. 한중 간 문화 교류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방한 당시 서울대 특강에서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고, 명나라 장군 진린의 후손(광둥 진씨)은 오늘까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서 정유재란 당시의 한중 역사를 거론해 주목을 끌었다.

정유재란은 이순신의 전쟁

2년간에 걸친 정유재란은 1598년 11월 말까지 조선 주둔 왜군이 전원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써 끝이 났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노량해전이 한창인 틈을 타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해 멀리 남해섬 남쪽을 돌아 부산으로 도주했다. 왜군이 떠난 빈 성들을 점령한 명군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떠벌렸다.

그러나 이순신을 뺀 정유재란의 승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순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킴)의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하고 격찬했다. 또 그 사실을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도 보고해 이순신에게 도독(都督)의 인수(印綬)를 내리게 했다.(‘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을 적으로 만난 일본조차도 임진·정유 7년전쟁을 ‘이순신의 전쟁’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도쿠토미 소호, ‘近世日本國民史’)

올 4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세미나 ‘세계 속의 이순신’에서 이언 바우어스 노르웨이 국방연구소 교수는 영국 군사학자 밸러드의 저서 등을 인용해 “영국인들은 넬슨의 업적을 다른 인물과 비교하는 것을 꺼리지만, 해전에서 패한 적이 없고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한 이순신은 넬슨과 비교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이노우에 야스시 일본 방위대 교수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의 승리가 ‘넬슨한테는 비교될 수 있어도 이순신한테는 비교될 수 없다’고 말했다”라며 이순신을 넬슨보다 한 수 위로 쳤다.

전 세계적으로 격찬 받는 성웅 이순신은 419년 전 노량의 겨울바다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던 듯하다. 젊은 시절부터 이순신을 보필했던 승려 옥형(玉泂)은 80여 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충민사에 머물면서 이순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왔는데, “해상에 만일 경보(警報)가 있으면 통제공께서 반드시 먼저 꿈에 나타나 기미를 보인다”고 말했다.(이수광의 ‘승평지·상’)

남해도·고금도=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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