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추억의 시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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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나는 머리 긴 여자가 좋아요. 그리고 내가 배고플 때 라면을 사주면 더 좋고. 그리고 그리고 막걸리를 마실 수 있으면 더 좋구요.”

기형도 시인(1960∼1989)이 1982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말은 그가 얻어먹은 밥값 대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 여성의 일기장(사진)에 남아 최근 시와 함께 알려졌다. 이 여성은 짐을 정리하다가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술도 고픈 청년들의 풋풋함이 전해진다.

아주 오랜만에 찾은 학교 근처 술집 벽의 낙서에서 지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옛일을 회상하는 일, 오래된 노트를 버리려다 눈에 들어온 글에 얼굴을 붉히는 일 따위에도 시한이 있을 게다.

그런 술집이 사라졌을 때, 낡은 종이 위의 문장 같은 것에는 무감해져 더 이상 짊어지고 이사를 다니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은 옛날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받는 이나 보내는 이 불명의 편지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보내려던 것인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을 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형도#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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