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페이퍼 클립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지난주부터 개학과 개강이 시작됐다. 개학 전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조카들의 연필, 일기장, 네임펜 같은 학용품들을 챙겨주고 나도 작업실로 돌아와 문구용품을 점검했다. 포스트잇, 녹색 하이테크포인트 펜, 색색의 페이퍼 클립은 한 학기를 보낼 만큼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하니까. 소설창작 수업은 보통 서너 시간씩 이어진다. 나는 수업 내용이나 과제 등을 타이핑한 후 출력해 가는데, 그 서너 장의 A4용지를 클립으로 고정시킨다. 입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을 블랙으로 선택하면서도 그때만큼은 빨간색 클립을 꽂는다. 수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쿄 긴자에 빨간색 대형 클립이 간판처럼 걸린 문구점이 있다. 도쿄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다니면서도 심벌을 왜 클립으로 정했는지 늘 궁금해하기만 하다가 이번에 찾아보니, 외국인 관광객도 거기가 문구점이라고 한눈에 알 수 있게 그곳 직원이 디자인한 거라고 ‘이토야 클립의 역사’에 소개돼 있다. 내가 만약 문방구를 차린다면 노랑이나 빨간색 몽당연필을 외관에 내걸고 싶다. 물론 클립도 좋다. 심플하고 아름답고 기능적이니까.

가장 흔한 은색 클립, “끝이 둥근 이중의 고리, 트롬본 같은 모습으로 휘어진 철사”는 클립의 종류 중에서 ‘젬클립’에 속한다고 한다. 클립에도 디자인의 변천이 이어져 종이에 끼우면 하트, 부엉이의 큰 눈, 삼각형, 나비 모양이 되는 제품들이 출시돼 있다. 재질도 황동이나 종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재치와 개성 있는 각종 형태의 클립들을 구경하다 보면 결국 선택을 하게 되는 요인은 취향이 아닌가 싶다. 디자인은 다양해 보여도 “탄력이나 나선을 이용”한다는 점, “소량의 종이나 서장 같은 것을 끼워두는 기구”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지난해 출판사에서 교정지를 받았는데 페이지 곳곳에 리본 모양의 핑크색 클립이 끼워져 있었다. ‘핑크 리본’이 주는 즉각적인 느낌 때문인지 잠깐 가볍고 즐거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주 구경하는 인터넷몰이 있는데 요즘 블랙의 세련된 덴마크 문구용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까만색 클립이 무척이나 세련되고 자신감 있게 느껴지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많다. 클립은 잃어버리고 어딘가로 보내서 줄어드는 것 같지만 돌고 돌아서, 타인들의 클립이 어쩐지 또 손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클립은 순환되며 재활용률이 높은 사무용품인가 보다.

오늘도 이 무생물의 작고 빨간 클립으로 강의 종이를 고정하며 생각한다. 좋은 선생이란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잘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거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대해서. 좋은 선생, 좋은 자식, 좋은 상사, 좋은 시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하든 비기너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늘 3월이 되면 그렇듯, 책가방을 챙기는 마음으로.
 
조경란 소설가
#페이퍼 클립#아리스토텔레스#새학기#3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