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好통/유원모]“쌓아온 성과 어쩌라고”… 젊은 인문학자들의 하소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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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모 기자
유원모 기자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ECC 극장에는 전국의 인문학자 19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최근 교육부가 ‘인문한국(HK)플러스 지원사업’에서 기존 43개 인문한국(HK)연구소를 신규 지원 대상에서 일괄 배제키로 한 방침이 알려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위해서다.

김성민 인문한국(HK)연구소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건국대 철학과 교수)은 “200명 가까운 인문학자들이 정부 정책에 반발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근대 대학 체제가 확립된 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공동성명에 서명한 교수는 계속해서 늘어나 540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눈에 띄는 건 젊은 학자들이었다. 박은영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교수는 한중일 3개국의 근대사를 함께 다루는 ‘동아시아사’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학과 소속이 아니라 연구소 소속이라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연구가 아닌 주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연구를 할 수 있었다”며 “연구소 중심 체제를 갖춘 해외 선진국들과 이제야 비슷한 환경을 갖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뿐 아니다. ‘제국’을 중심으로 동서양을 넘나들며 제국사를 연구하는 최진묵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인공지능(AI)을 현대 프랑스 철학과 결합해 의미를 찾아가는 김재희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 등 인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젊은 신진 인문학자들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육부가 “다른 연구소에 기회를 주고, 신규 수요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면서 더 이상 연구소에 머무를 수 없게 됐다. 당장 실직이 걱정되진 않을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박 교수는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위 학과를 넘어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해온, 축적된 성과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 걱정”이라며 “이공계와 사회과학계엔 수십 개에 달하는 국책연구원이 인문학계엔 하나도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교육부의 의도처럼 새로운 인문학 연구소를 양성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키운 인문학 자산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인문학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의 수준은 인문학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말도 있다. 인문학 진흥 정책이 국가 정책의 품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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