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감]피아니스트 서혜경씨 ‘소설 연주회’

  • 입력 2006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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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 씨의 소설 ‘피아노소나타 1987’을 낭독하는 최강지 씨(오른쪽)와 소설에 등장하는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서혜경 씨. 원대연  기자
강유일 씨의 소설 ‘피아노소나타 1987’을 낭독하는 최강지 씨(오른쪽)와 소설에 등장하는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서혜경 씨. 원대연 기자
《“강보를 펼쳤을 때 새파랗게 질려 질식사하기 직전인 아기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아기가 입 속에 한 줄기 기다란 박하 잎을 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이가 숨을 쉰다!’” 낭랑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커졌다. 재독 소설가 강유일(52) 씨가 지난해 10월 펴낸 소설 ‘피아노소나타 1987’(민음사)에서 북한 스파이 한세류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던 절박한 풍경을 전하는 부분이다. 이어 슈베르트의 ‘마왕’이 연주됐다. 악마에게 쫓기는 말발굽을 나타내는 셋잇단음표들이 절박하고 암울하게 들렸다.》

2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예장동 ‘문학의집·서울’에서 ‘소설 연주회’가 열렸다. 카네기홀이 세계 3대 피아니스트로 선정한 서혜경(45) 씨의 연주회로, 피아노 위에는 악보와 함께 소설의 주요 대목이 담긴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간 시화전 등을 통해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종종 이뤄졌지만 문학과 음악이 만난 것은 처음이다. 이색적인 연주회여서인지 이날 120여 명의 관객이 몰렸으며 일부는 자리를 잡지 못해 바닥에 앉은 채 숨을 죽여 가며 감상했다.

소설 낭독은 연극 연출가 최강지(57) 씨가 맡았다. 지난해 소설을 읽고 감동받은 최 씨가 가까운 사이인 서 씨에게 ‘소설 연주회’를 제안함으로써 자리가 마련됐다. ‘피아노…’는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을 모티브로, 북한의 특수공작원 한세류와 남한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안누항 간에 얽힌 사연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고발한 소설이다.

“그 국제 콩쿠르에서 나는 놀랍게도 최고상 없는 공동 수상자가 됐다. 동시에 나는 최연소 수상자이기도 했다. 거듭되는 국제 콩쿠르 입상 후 유명 교향악단들로부터 협연 요청과 독주회 제의가 왔다. 고국 정부는 내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안누항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대목을 낭독한 최 씨가 말을 이었다. “실제로 서혜경 씨도 1980년 세계 최고 피아노 콩쿠르 중 하나인 이탈리아 부조니 콩쿠르에서 최고상 없는 최연소 공동우승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서혜경 씨는 두 차례 더 저명한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안누항과 서 씨의 이력이 닮은 것은 우연의 일치다. 이날 연주회에 참석한 강유일 씨는 “서혜경 씨의 경력에 대해 전혀 모르고 소설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우연은 서 씨가 소설 연주회를 기꺼이 수락한 동기가 됐다. 서 씨는 “주인공이 나와 너무나 닮아 친근감을 느꼈고, 읽으면서 소설의 장엄한 주제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서 씨가 마지막 곡인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카덴차 부분을 연주했을 때다. 비행기 폭파사건으로 오른팔을 잃은 안누항이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낭독한 뒤였다. 서 씨도 오른쪽 팔에는 숄을 덮고 한 손으로만 연주했다. 관객들에게, 또 그 자신에게 소설 장면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열정적인 연주 도중 숄이 벗겨졌지만 서 씨는 연주에만 몰두했다.

연주가 끝난 뒤 뜨거운 박수를 받은 서 씨는 “소설의 극적인 묘사를 귀로 들으면서 연주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면서 “관객들이 열중해 듣는 모습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소설가 강 씨는 “집필 중 그랜드피아노를 사서 집에 들여놓고 수없이 두드리면서 피아노 음을 문자로 옮기는 데 고민했었다”며 “이렇게 문자와 건반이 만나니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넘어선 낯설고 강렬한 매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작품 전체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소설과 음악은 닮았다. 이날의 행사는 특히 낭독과 연주, 이 중으로 귀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관객 김정희(28) 씨는 “목소리와 선율이 번갈아 전달돼 눈으로만 읽었을 때와는 다른 감동이 전해 왔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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