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대통령이 빠진 善惡 이분법의 함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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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이사장 등 公기관 인사 의혹
산(生)권력 향한 檢 수사가 낱낱이 밝혀야
느닷없이 남북관계 비판론 질타한 대통령
선악 이분법으로 통치하면 입지 더 좁아져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요즘 많은 국민이 말없이 주시하는 곳이 서울동부지검이다. 이곳에선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남부지검의 손혜원 부친 상훈 수사를 제외하곤 산(生)권력을 향한 유일한 수사다. 적폐청산 수사 때는 타깃으로 찍으면 어떻하든 구속시키고 마는 ‘놀라운 수사력’을 보여준 검찰이 산권력에 대해서도 그런 수사력을 발휘할지, 검찰의 독립과 명예가 걸린 수사다.

동부지검은 어제 국립공원공단 권모 이사장을 불러 조사했다. 요즘 언론에 나오는 수사 속보는 귀를 의심케 한다. 2017년 9월 공단 이사장 공모 때 환경부가 권 씨의 서류심사 지원서 내용을 첨삭까지 해준 정황이 드러났다고 한다. 단지 밀어주는 차원을 넘어 반드시 이사장이 되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한 정황이다.

도대체 정권과 얼마나 각별한 인연이길래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런 궁금증에서 취재를 해봤다. 사실 그의 임명을 놓고 돼지국밥집 주인이 등산을 좋아해 공단 이사장이 됐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는 걸 안다. 사실일까.

확인해본 결과 그가 부산에서 20여 년 전부터 돼지국밥 식당을 운영했던 것은 맞다. 지금은 식당 운영은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식당 사장으로만 규정하는 건 무리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온 뒤 조선소에 다니다가 산이 좋아 직장을 그만두고 히말라야 등 숱한 국내외 산을 오르내렸으며, 부산 어린이대공원에서 첫 노인무료급식 사업을 시작하고 라오스 등에서도 많은 봉사활동을 했다. 문 대통령이 히말라야에 갈 때 동행한 게 인연이라고 한다.

어떤 생업을 갖고 있었느냐가 자격을 판단하는 요소가 되어선 안 된다. 직원 2200명이 넘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 경륜과 리더십을 갖췄는지를 평가해야한다. 어쨌든 문 대통령이 반드시 보은을 해야 할 그런 각별한 인연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환경부는 왜 그렇게 무리를 한 걸까.

한 인사는 여권 핵심 그룹의 특징을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정당한 일’이라고 신념화해 관철하는 게 행동패턴화됐다”고 설명한다. 자신들은 도적적인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반대 세력은 부도덕한 동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세상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면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지금 밀고 나가는 방향에 무리수가 있어 보여도 대안은 없다. 공단 이사장 자리는 어차피 과거에도 정치인이나 퇴직 관료들 차지였으니 그보다는 (위에서 낙점한) 산애호가가 적임자라고 정당화하는 논리를 체화하고 관철시켰을 것이다. 인사 참사 책임론에 청와대가 “뭘 잘못했느냐”고 반박한 것도, 자기 정당화의 논리에 함몰된 탓이다. 그 논리가 성냥개비를 얼기설기 쌓아올린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인사 파동 내내 침묵하던 문 대통령은 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미동맹간 공조의 틈을 벌리고, 한반도 평화 물길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북미의 대화 노력 자체를 못 마땅히 여기고, 갈등과 대결의 과거로 되돌아가려 하는” 세력을 겨냥해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긴박했던 위기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질타했다.

침묵하던 대통령의 첫 공개발언으로는 느닷없다는 느낌은 차치하고 사실관계도 수긍하기 어렵다. 한미공조 엇박자의 주된 책임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집착에 있다. 긴박했던 위기 상황을 반전시킨 제1의 공(功)은 대화 자체가 아니라 김정은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낸 공고하고 집요한 2017년의 국제제재에 있다.

이분법적 편 가르기는 정치투쟁 단계에선 거의 본능적 생존수단이며 선전선동에 매우 유용한 방법론이지만 정책과 통치의 단계에서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함정이 된다. 칼로 무 베듯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현실은 많지 않다. 밤과 낮 사이에도 여명과 황혼처럼 시나브로 변하는 회색지대가 있고, 동지와 적 사이에도 무수한 회색지대의 아이콘이 널려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책 방향과 속도에도 여러 선택지가 있고 다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경제·사회 정책, 역사 이슈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옳다고 믿는 것만이 선이고 나머지는 악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하면 선택지는 좁아진다.

촛불 vs 적폐, 다함께 잘사는 사회 vs 기득권층의 특권사회, 통일·평화 vs 전쟁…이렇게 나누어야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상대를 도덕적으로 먹칠해 고립시키고 회색지대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교집합은 갈수록 작아진다. 배제되는 원(圓)이 많아질수록 지도자의 입지는 전체의 리더가 아니라 협소한 자기 진영의 우두머리로 축소될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서울동부지검#환경부 블랙리스트#적폐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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