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원의 ‘건축 오디세이’]안방마님 옆에 ‘천박한’ 첩을 들이겠다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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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스턴 ‘존 행콕 타워’

그림 이중원 교수
그림 이중원 교수
이중원 건축가·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이중원 건축가·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만약 누가 우리 종묘 옆에 현대 유리 마천루를 짓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념적으로는 조선의 구심점이었고, 개념적으로는 간판 한옥인 종묘 옆에 고층 유리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언성 높은 논쟁이 들리는 듯하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보스턴 코플리 스퀘어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종묘’가 그들의 ‘트리니티 교회’였고, 새 유리 마천루가 그들의 ‘존 행콕 타워’(그림 오른쪽 높은 건물)였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트리니티 교회는 미국 건축가들이 ‘유럽식 건축’에서 벗어나 ‘미국식 건축’을 표방하며 세운 전통 미국 건축 1호이다. 건축가는 헨리 리처드슨이다. 보스턴 출신의 건축가 리처드슨은 하버드대를 나와 파리에서 유학했다. 그는 유럽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미국 건축계에 ‘유럽식’ 건축과 ‘뉴잉글랜드식’ 건축을 혼합해 ‘리처드소니언(건축가 이름에서 유래) 로마네스크’라는 새로운 미국식 건축 양식을 만들었다. 미국 건축사학자들은 트리니티 교회를 미국식 건축 양식의 시초로 본다. 교회는 보스턴 대표 광장인 코플리 스퀘어에 있는 시의 자부심이다.

갈등의 발단은 프루덴셜 타워 였다(그림 왼쪽 높은 건물). 이 건물은 준공 당시 52층으로 보스턴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였다. 보스턴 기업이 아닌, 외지 기업이 들어와 코플리 서쪽으로 정사각형 타워를 지었다. 저층 벽돌 건축 동네인 보스턴에 혼자 우뚝 섰다. 타워는 ‘최대 면적, 최대 수익, 확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워진 박스 타워였다. 이는 역사와 예술과 지식으로 먹고사는 보스터니안(보스턴 사람)에게 장사꾼 뉴요커(뉴욕 사람)가 가하는 선전포고였다.

행콕 타워의 건축가인 헨리 코브는 최근 저서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프루덴셜 타워는 코플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코플리, 너는 과거야. 이제, 이 도시의 미래는 나야!” 코플리는 프루덴셜에 중심 상권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문화마저 빼앗겼다. 보스터니안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특히 프루덴셜의 경쟁 회사이자 보스턴 토박이 보험사인 존 행콕이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다. 행콕은 반격을 기획했다. 잠자고 있던 저층 동네인 보스턴에 프루덴셜이 고층 마천루로 일격을 가해 깨운 만큼 행콕은 마천루로 응수하고자 했다.

행콕이 선정한 대지는 바로 트리니티 교회 옆이었다. 트리니티 교회 옆에 행콕이 유리 마천루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공개되자, 보스턴 건축계는 술렁였다.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대학장 등 시 전문가 자문단은 “현재의 물리적 조건(트리니티 교회에 인접한 상황)으로는 그 어떠한 합리적인 건축적 솔루션이 도출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건축주인 행콕도 밀리지 않았다. 시공 허가를 인가해 주지 않으면 1만2000명의 직원을 데리고 본부를 시카고로 이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새로운 화이트칼라 서비스 산업 고용창출에 목말라 있던 보스턴시는 행콕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지어진 행콕 타워는 보스턴에서 트리니티 교회에 버금가는 랜드마크 건축이 됐다. 보스턴 출신의 건축가 코브는 트리니티 교회의 존재감을 죽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최대한 지웠다. 그 일환으로 정사각형 타워 대신 평행사변형 타워를 세웠다. 덕분에 트리니티가 드러나고 행콕은 물러난다.

평행사변형 타워인 탓에 행콕 타워의 코너는 예각으로 접혀 코너가 종이처럼 얇아 보인다. 타워의 좁은 면에 홈을 파서 검은색 스테인리스스틸을 부착했다. 안 그래도 평행사변형의 타워라 하늘로 치솟는 효과가 첨예한데, 수직으로 파인 검은 철 띠가 전 층을 관통하며 타워의 날카로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

행콕 타워는 모더니즘 유리 박스 마천루처럼 이론으로 무장한 이념적인 건축도, 그렇다고 프루덴셜 타워처럼 수익만을 당기려는 상업적인 건축도 아니다. 주연이 되고자 하기보다는 조연이 되고자 하는 건축이다. 자기주장이 강한 건물이라기보다는 남의 주장을 세워주는 건축이다. 철저히 자기를 비우는 건축이다. 하늘의 상황에 따라 타워의 표정이 바뀐다. 그 결과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던 코플리는 미래로 전진하는 계기를 연다.
 
이중원 건축가·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미국식 건축#프루덴셜 타워#행콕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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