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26〉시어머니가 그린 며느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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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닐 ‘노란 모자를 쓴 지니’. 1971년.
앨리스 닐 ‘노란 모자를 쓴 지니’. 1971년.
‘영혼의 수집가’라고 불린 미국 화가 앨리스 닐이 그린 며느리의 초상화다. 노란 털모자에 싸구려 모피 코트와 헐렁한 흰 바지를 입은 25세의 버지니아는 시어머니 앞에 퀭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마약을 한 것처럼 눈동자는 수축됐고, 깡마르고 벌어진 두 손과 앞으로 기울인 자세에선 불안감과 경계심까지 느껴진다. 닐은 왜 갓 시집온 며느리의 이런 모습을 그린 걸까?

1900년생인 닐은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자로서 굴곡진 삶을 살면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쿠바인 화가 남편 사이에서 낳은 첫딸을 돌 전에 잃고, 둘째 딸마저 남편이 데리고 떠나버린 후 신경쇠약과 자살 시도로 정신병원에 1년간 입원도 했다. 헤로인 중독자였던 첫 동거남은 그녀의 그림 350여 점을 불태우는 엽기를 보여줬고,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두 번째 동거남은 출산한 지 석 달 된 닐과 아들을 뉴욕의 할렘에 버리고 떠났다. 2년 후 좌파 영화감독을 만나 둘째 아들을 얻었다. 닐은 싱글맘 화가로 뉴욕의 가난한 스페인계 할렘에 살며 이웃 주민과 친구, 가족들의 초상을 그렸다. 남성 중심의 뉴욕 화단에서 40년간 철저히 무시당하다 1960년대 말 페미니즘이 등장하고 나서야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 그림이 그려진 1970년대 초는 페미니즘 운동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반전시위가 거세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이 초상은 당시 뉴욕 할렘가 젊은이의 불안한 심리와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히피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앨리스는 가엾은 사람을 사랑했다. 그녀는 영웅 속의 가엾은 사람을, 가엾은 사람들 속의 영웅을 사랑했다. 나는 그녀가 우리 모두에게서 그것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가 한 말이다. 훗날 그녀는 시어머니 닐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내 시어머니는 여자들의 영웅이었다. 난 진심으로 그녀를 존경했다.” 평생 자신과 같은 약자들을 사랑하고 그렸던 닐은 결국 그들의 영원한 영웅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앨리스 닐#노란 모자를 쓴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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