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21〉완벽한 복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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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20년경.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20년경.
올해 6월 런던국립미술관은 스물한 번째 여성 작가 작품을 구입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2300점이 넘는 이곳 소장품 중 여성 작가 작품은 겨우 20점으로 1%가 못 되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46억 원을 들여 구입한 그림은 17세기 최고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이다. 젠틸레스키는 신화나 성서에 등장하는 여성에 빗대어 그린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그중 성서 속 유디트를 가장 많이 그렸다. 왜 하필 유디트였을까?

17세기는 여성이 화가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어렵던 시대였다. 화가 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아 화가가 됐다. 하지만 19세 때 그림 스승이자 아버지의 동료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로마 법정까지 가게 되었고, 피해자였던 젠틸레스키는 오히려 치욕적인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다. 또 자신의 주장이 허위 사실이 아님을 확인받기 위해 심한 고문까지 당했다. 결국 타시는 유죄 선고를 받았으나 로마에서 추방되었을 뿐 다시 예전처럼 작품 활동을 했다. 이에 분개한 젠틸레스키는 성경 속 유디트 이야기를 그려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했다. 유디트 얼굴엔 자신을, 적장의 얼굴엔 타시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유디트는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그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의 영웅이다. 젠틸레스키는 재판 진행 중에 이 주제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고, 몇 년 후에도 여러 버전으로 반복해 그렸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자신의 상처와 타시의 범죄 사실을 그렇게 지속적으로 세상에 알렸다.

그림 속 유디트가 손에 쥔 십자가 모양의 칼은 이것이 개인적 복수가 아닌 신의 이름으로 불의를 응징하는 행위임을 암시한다. 타시는 젠틸레스키 덕분에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유명 인사가 됐다. 화가가 아닌 강간범으로서 말이다. 칼이 아닌 붓을 쥔 화가 젠틸레스키가 선택한 완벽한 복수였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런던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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