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史]〈52〉리더의 진정한 용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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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가 마지막을 향해 치달을 때다. 진나라의 명장 백기는 기원전 262년 장평에서 조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항복한 포로 40만 명을 학살했다. 과장된 숫자겠지만 충격적인 대량 학살이었음은 분명하다. 백기는 나중에 모함을 받아 죽게 됐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가’ 분해하던 백기는 문득 조나라 포로 살해 사건을 떠올리고는 ‘하늘이 그 죄를 벌하는구나’라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한나라 장군 이광은 명장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이상하게 승진에는 불운했다. 그는 점쟁이를 찾았다. 점쟁이는 후회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광은 과거 농서 태수로 있을 때 항복한 강족 800명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광은 강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출세하려면 반란의 재발을 막아야 했다. 목적이 앞서다 보니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백기와 이광이 학살극을 벌일 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춘추시대는 국가를 복속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지만 전국시대에는 정복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상대의 전투력을 고갈시키는 것이 전략적 수단이 됐다. 그러다 보니 항복한 군사도 학살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설득했을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불행을 마주할 때 과거 사건을 떠올린 것을 보면 가슴속 깊숙이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았던 것 같다.

두 고사가 주는 교훈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사의 진짜 교훈은 인간은 막상 대업, 거대한 명분, 커다란 이익과 마주치면 너무나 쉽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학살극이 벌어지는 것처럼 성인군자인 척, 도덕적이고 원칙주의자인 척하던 사람이 막상 권력을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내로남불’이 성행한다. 진정한 리더는 도덕과 원칙으로 무책임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진실하고 솔직하게 방법의 한계를 인정하며, 최선의 길, 가능하면 양심과 도덕의 최선을 사수하려는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임용한 역사학자
#전국시대#백기#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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