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품격과 연민의 깊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따뜻한 물, 더 빨리 언다’… 음펨바 효과 닮은 한국사회
한순간 달궈졌다 금세 냉각
석달간 세 번의 테러 덮친 英, ‘애도와 일상’의 공존 보여줘
위기 통해 공동체 강해지려면 정치부터 신뢰의 다리 복구해야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섭씨 35도와 5도의 물이 있다. 동시에 냉각하면 어느 쪽이 빨리 얼까. 찬물이 먼저 얼 것 같지만 그 반대란다. 특정 상황에서 높은 온도의 물이 더 빨리 어는 것을 ‘음펨바 효과’라 부른다. 1963년 탄자니아의 중학생 음펨바는 조리수업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만들던 중 식지 않은 재료를 넣을 때 빨리 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교사들이 무시한 소년의 호기심은 몇 년 뒤 그의 고등학교를 찾은 영국 물리학자의 실험 덕에 세상에 알려졌다.

따뜻한 물은 많은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어 얼 때도 빠르게 에너지를 방출한다. 음펨바 효과에서 엉뚱하게도 한국을 떠올리게 된다. 무슨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벌집 쑤신 듯 온 사회가 뜨겁게 달궈졌다가 금세 냉각되는 과정이 흡사하게 느껴진다. 울음과 울분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관습의 사회에 살다 보니 요즘 영국이 새롭게 보인다. 석 달 새 무방비 상태의 시민을 겨냥한 무자비한 3연속 테러가 이어졌다. 이 날벼락 같은 참변에 대처하는 이 나라의 자세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애이불비(哀而不悲)라 할까. 정부도 국민도 의연하고 차분하다. 만약 한국이라면?

테러 참극 희생자 중에 8세 소녀도 있었다. 캐나다에서 여행 온 젊은 여성이 전쟁터처럼 변한 현장에서 약혼자 품에 안겨 눈을 감은 애틋한 사연도 전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용히 추모하고 언론은 차분히 사실을 보도한다. 온 나라는 위기상황에 똘똘 뭉쳤고 공동체 내부의 돌팔매질과 저주는 찾아보기 힘들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평범한 일상의 나날로 복귀하려는 노력이 울림을 준다. 맨체스터에서 15세 딸을 잃은 엄마는 공동체의 관심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우리는 뭉쳐야 한다”고 호소했다. 테러 이틀 뒤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유로파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행진은 생략했어도 선수들이나 경기장 안팎 팬들은 환호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식의 비난은 들리지 않았다. 만약 한국이라면?

그로부터 12일 만에 런던 테러가 터졌을 때 영국은 또 한 번 애도와 일상의 공존을 택했다. 일상의 복귀가 최상의 보복이라는 듯이. 총선 유세는 하루 만에 재개했고 8일 총선도 예정대로 치른다. 경찰은 최종 발표 때까지 섣불리 범인에 대해 예단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의 행동수칙을 알려주듯 사회의 무게중심을 최대한 끌어내린다. 이렇게 쌓아올린 사회적 믿음이 안정과 직결됨을 오랜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만약 한국이라면?


갑작스러운 재앙 앞에서 평정심과 체제 안정을 지키려는 영국인의 조용하지만 강인한 투쟁은 불안과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이 가장 격렬한 저항이라는 공감대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일상을 허물지 않는 것이 사회의 굳건한 보루라는 경험적 체득. 그렇게 하여 위기 때마다 이를 거름 삼아 공동체는 더 튼튼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타까운 희생도 헛되지 않은 것으로 승화된다. 한국은?

나랏일에 무심한 것보다 관심을 갖는 편이 좋지만, 지나고 보면 헛소동에 불과한 일도 얼마나 많은가. 흥분과 화풀이는 자기 위안의 방편일 뿐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곤 했다. 그럼에도 냉온탕 오가는 듯한 조급증을 버리지 못한 데는 정부와 정치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탓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과 사회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불신의 그림자가 똬리를 틀고 있으니 진영이 다르면 무슨 말을 해도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지레짐작한다. 나는 너를 믿지 않고, 너는 나를 믿지 못한다. 그러면서 늘 한민족임을 앞세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1세기를 이끄는 힘을 ‘신뢰’라고 강조했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35개 회원국 중 한국의 사회 신뢰도는 평균을 밑돈다. 신뢰 결핍을 해소하지 못하면 1인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문턱을 어찌어찌 넘어선다 해도 삶의 모양새가 달라질 성싶지 않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신뢰, 사회적 자본이 제도보다 우선입니다. 신뢰가 먼저냐, 민주주의가 먼저냐? 신뢰가 먼저입니다.” 1년 남짓 나라 경영을 한 결과 무너진 신뢰의 다리를 복구하는 것이 시급한 화두라 판단된 듯하다.

‘해가 지지 않은 나라’로 세계를 리드했던 위엄의 유산일까. 돌발 위기에도 감정을 절제하며 흔들리지 않는 일상을 이어가는 나라, 영국을 보며 나라의 품격과 인간의 자존을 다시금 돌아본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애도와 일상#영국 테러#프랜시스 후쿠야마#영국의 품격#인간의 자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