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해의 인사이트]허세 감사원장과 실세 사무총장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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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 논설위원
최영해 논설위원
이명박(MB) 대통령의 임기를 2년 남겨둔 2011년 3월 감사원장이 된 양건은 사무총장과의 불편한 관계로 두 차례나 곤욕을 치렀다. 당초 MB는 2010년 말 김황식 감사원장을 총리로 지명하면서 감사원장 자리에 정동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발탁했다. ‘대통령 측근을 앉혀 감사원을 쥐락펴락하려 한다’는 야당의 반발 끝에 정동기 대타로 지명된 사람이 국민권익위원장을 지낸 양건 한양대 법대 교수였다. 양건은 재임 중 경북고 출신 사무총장 정창영과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다고 감사원 사람들은 말한다. 정창영은 청와대 TK(대구경북) 실세들과 각별한 사이였다.

“차라리 원장을 잘라라”

정 총장이 총무과장과 비서실장 등 핵심 자리에 자신의 측근을 배치해 원장의 눈과 귀를 가린다고 판단한 양건은 분노했다. 급기야 청와대에 “나를 자르든지 아니면 사무총장을 내보내라”고 요구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그의 말이 먹혔는지 모르지만 정창영은 양 원장과 일한 지 11개월 만에 코레일 사장으로 나가고 그 자리엔 양건의 경기고 서울대 법대 후배가 발탁된다.


2013년 2월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양건은 또다시 사무총장에 휘둘리는 불운을 맞는다. 진주고 출신 김영호가 사무총장에 낙점되면서다. 박근혜 청와대는 ‘MB 사람’인 양건을 제치고 김 총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양건은 새 정부 출범 6개월 만에 4년 임기의 절반만 채운 뒤 물러난다. 4대강도 재탕 삼탕 감사하면서 권력의 입맛에 맞췄지만 이미 눈 밖에 난 처지였다. 인정사정없는 권력 투쟁의 속살을 다 보았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감사원 사무총장에 경남고 후배인 왕정홍 감사위원을 임명했다. 왕정홍은 내년 4월이 감사위원 임기지만 사무총장으로 발탁된, 이례적인 인사다. 감사위원에서 사무총장으로 유턴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감사위원을 끝으로 옷을 벗는 게 관례였다. 그는 대통령과 고교 동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왕(王)총장’ 소리를 들을 것이다. 11월 임기가 끝나는 황찬현 원장의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엊그제 감사원이 발표한 ‘면세점사업자 선정실태’는 공교롭게도 왕 총장 취임 후 첫 작품이 됐다. 감사원은 2015년 2차례 면세점 선정 때 관세청이 장난을 치고, 지난해 면세점 4개를 추가로 내줄 때 벌어진 권력 비리를 박근혜 정부가 힘이 다 빠졌을 때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감사 요청을 한 뒤에야 움직였다. 감사원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대로 했다면 면세점 혼란을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초 3월에 발표하기로 했다가 3개월 이상 쥐고 있다가 이제 내놓은 이유도 석연찮다. 정권이 바뀌면 감사 잣대도, 결과도 달라지는 법인가.

황찬현의 얄궂은 운명

감사원은 대통령 소속이지만 청와대를 감사하는 독립기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권교체만 되면 청와대에서 감사원장을 밀어낸 흑(黑)역사가 비일비재했다. 여기엔 권력의 입맛에 맞는 감사에 앞장서 불신을 초래한 측면도 없지 않다. 이번엔 황 원장의 임기가 채 반년이 남지 않아 임기를 채울 가능성이 있다. 문 대통령도 감사원장 임기를 보장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으니 나쁜 선택만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황 원장이 보수정권의 ‘적폐청산’에 앞장서야 할 운명이라는 데 있다. 당장 문 대통령 지시가 떨어진 4번째 4대강 감사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감사원 조직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명예를 중시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그의 처지가 참 얄궂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이명박#양건#김황식#정동기#감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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