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33>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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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
김용석 철학자
‘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마지막 연입니다. 시인은 가을에는 기도하기를 바라고 사랑하기를 원하다가 마지막에는 ‘홀로 있기’를 갈구합니다. 시인은 ‘정신의 고지(高地)를 점유하여 인생에 대한 시야를 가없는 영원까지 넓힐 수 있는’ 사색의 고독을 유독 사랑했습니다.

고독은 사색 명상 신앙 영원에의 염원 등의 의미와 밀접한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 독립 자유 낭만 여행 등의 의미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후자의 의미들과 연관하여 요즘 세대들은 고독을 일상화하고 있다는 문화비평적 관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소셜미디어 덕에 무한한 정보와 초연결되는 사회에서는 홀로 먹고, 마시고, 영화 보고, 여행하는 ‘홀로족’이 늘고 있다는 뜻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들은 ‘고독을 친구 삼으며’ 자신에게 몰입하는 삶의 방식, 곧 ‘홀로 삶’을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정말 고독을 향유하는 걸까요? 사람들이 고독의 의미에서 간과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독에는 좀 더 세속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고독의 형이상학적 숭고함을 말하기 전에 고독의 실용적 미덕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고독은 정신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육체적인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홀로 있는 순간 휴식의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건 고독이 곧 휴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상하게 정신의 휴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의 휴식을 의미하며, 몸 전체의 균형을 잡는 데 필요한 휴식을 뜻합니다. 고독은 몸 전체의 조화를 회복시켜 줍니다. 인간의 감각이 온갖 미디어와 초연결된 사회에서의 고독은 ‘의사(擬似) 고독(pseudo-solitude)’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에서는 감각적 휴식으로서 고독의 순간이 더욱 귀해집니다. 점점 사람을 닮아가는 ‘똑똑한 기계들’과도 잠시 떨어져 홀로 있을 필요가 있는 거지요.

감각적 휴식이 고독의 조건이 될 때 사람들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습니다. 관조하게 됩니다. 관조의 대상을 거울삼아 자신의 깊은 곳을 비춰보게 됩니다. 사색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고독은 절로 오지 않습니다. 어느 저녁, 어느 주말처럼 일상에서 구체적 휴식의 순간을 기획할 때 오며, 이는 자연스레 사색의 기회로 이어집니다.

김현승 시인만큼이나 가을과 고독을 노래했던 릴케는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경탄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중력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색의 고독은 우리 감각이 외부의 인력에 끌리지 않고 우리 자신이 중력의 중심이 되도록 해줍니다.

환경 변화로 사계절엔 양적 균형이 없어졌습니다. 봄과 가을은 점점 더 긴 여름과 긴 겨울 사이에 끼인 ‘틈새 계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을이 더없이 소중합니다. 나무들도 홀로 있기 위해 나뭇잎들을 떠나보내고 있습니다. 낙엽은 나목(裸木)의 고독을 위한 자연의 배려입니다. 나목은 이제 긴 휴식에 들어갑니다. 나목은 중력을 자기 내면으로 잔뜩 모으고, 생명의 주재자인 태양에도 무심할 수 있는 절대고독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인간은 자연의 긴 보폭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자연을 짧게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 일상에서 휴식과 사색이 있는 고독의 순간을 기획하고 실천하면서 말입니다.

김용석 철학자
#김현승 시인#가을의 기도#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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