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가만히 있을 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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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디지털 문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사람들은 유행처럼 ‘느림의 미덕’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스마트한 디지털 기기와 함께 즐겁고 다양한 활동을 즐기던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찾고 있습니다. ‘멍 때리기’, 이것이 요즘 유행입니다.

‘멍 때리기 대회’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대회의 규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에게는 몇 가지 활동이 금지됩니다. 그 첫 번째가 ‘스마트폰 확인’입니다. 의미심장합니다. 그 밖에 잡담, 노래와 춤, 웃음 등이 금지됩니다.

멍 때리기에 대해서는 고대로부터 철학자들도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신(神)은 부동의 쾌락을 즐기는 존재입니다. 신적 쾌락은 움직임이 아니라 ‘부동의 정적(靜寂)’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 명상이나 면벽수도 등으로 신적 쾌락을 모방하며, 영적 고양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보통 사람들의 쾌락은 활발히 움직이는 데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는 노래 부르고 춤추거나, 운동을 하거나, 온갖 게임을 즐기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명상록’을 쓴 파스칼도 인간의 활동성에 주목하면 인간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는 행동들은, 모두 일일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심심풀이의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파스칼이 사용한 오락 또는 심심풀이의 뜻을 지닌 프랑스어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은 오늘날 국제어가 된 ‘엔터테인먼트’에 해당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소란스러움과 활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옥살이가 매우 두려운 형벌이 된다”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진심으로 휴식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활동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레저활동을 미리 내다보고 비판하는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하나,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데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인간의 오감은 다양하고도 잘(?) 조직된 문화적 자극에 쉴 새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감은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면 퇴행성 변화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기관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 자신의 탈진(脫盡)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인류 역사의 주요 이슈가 ‘자연의 소진’에서 ‘인간의 탈진’으로 이동할지 모릅니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실존적 문제가 ‘소유냐, 존재냐’라는 물음에 담겨 있었다면, 디지털 사회의 실존성은 ‘활동인가,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멍 때리기는 인간 활동의 임계점에서 우리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도인 것 같습니다. 한때 인터넷상에서 ‘잊혀질 권리’를 찾았듯이 이제 ‘가만히 있을 권리’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권리는 누가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각자 ‘내가 찾아야’ 합니다. ‘나를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 실천은 일상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초연결사회에서 외부의 자극과 부름에 모두 응답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거절의 지혜와 기술을 발휘하는 데에 있습니다. 남들이 다 한다고 따라 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권리를 찾는 일은 ‘개성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삶의 멋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행복을 맛보는 길이기도 합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디지털 문화#스마트 기기#멍 때리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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