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리더십 아닌 코디네이터십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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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요즘처럼 정치적 이슈들이 우리 일상을 파고든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지라 정치인들의 말도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당연한 듯하지만, 사실 알쏭달쏭한 말들도 많습니다. ‘국론 분열’은 안 된다고 합니다. ‘국민 대통합’을 외칩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선에 나가는 정치인들이 이렇게 강한 구호를 외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설입니다만, 아마도 ‘리더십’이라고 하는 언어와, 그 언어가 오랫동안 축적해 놓은 관념의 허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리더라는 말에는 ‘이끌어 가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때 영도자라고 번역해서 쓰기도 했습니다. 매우 강한 의미의 말이지요. 이끌고 가려 하니까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됩니다. 리더십이라는 의식의 틀에 갇혀 있으면 다수의 단합된 집단을 미리 전제하게 됩니다. 영도자는 독선적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확고한 목표를 전제하기도 합니다. 현실 정치에서 정책적 목표는 비판의 담금질을 받고 재설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고부동한 목표를 전제하면, 합의를 위한 소통을 배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지만, 전체주의 국가의 통치권자는 영도자의 명칭을 갖고 있었습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어로 ‘두체(Duce)’였고, 히틀러는 독일어로 ‘퓌러(F¨uhrer)’였습니다. 둘 모두 리더로 직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국민은 어떤 경우라도 항상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국민 대통합의 원칙도 전체주의의 특징이었습니다.

리더십의 함정은 리더십 그 자체에 있습니다. 리더십은 정치인의 아편과 같은 것입니다. 중독되어 있으면 정치적 인식의 관점을 바꾸거나 다른 통치 방식을 생각할 수 없게 되니까요.

이러한 리더십의 폐해를 수정하려고 다양한 수정주의 리더십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공유 리더십, 분산적 협업적 수평적 리더십 등인데, 이 말들 자체는 모두 형용모순입니다. 이끈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수정의 요체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끌어 가지 말고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권한 집행을 균형 있게 분산해서 통치의 과업을 조정하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이해 당사자들과 소통하라는 것입니다. 소통을 잘하려면 앞에서 끌고 가면 안 됩니다. 앞에 있는 만큼 뒤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입니다. 소통을 하려면 옆에서 함께 가야 합니다.

언어는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필자는 20여 년 전에 리더십 대신에 ‘코디네이터십’이라는 말을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중적 호응을 별로 받지 못했습니다. 리더십만큼 매력적이지 않고 힘도 없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새 대통령은 국민을 통합해서 이끄는 지도자나 영도자가 아니라, 나라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의 조정자로서 전범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정치는 타협이고, 통치는 정책입니다. 좋은 정책이 정치적 타협을 가능하게 하며, 정치적 타협은 통치의 지지 기반이 됩니다. 정치적으로 넓게 지지받는 통치자는 좋은 정책을 또 개발할 수 있겠지요.

정치에도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창의적 정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정치인은 설득력 있는 정책과 합의할 수 있는 통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도 폭넓은 시각과 다양한 의견을 평가 조정 수렴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즉 코디네이터십이 필요합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대통령 선거#리더십#코디네이터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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