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닫힌 사회와 혐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최근 몇 년 사이 사용 빈도가 아주 많아진 단어가 있습니다. 혐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이 단어의 사용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 윤리적 차원에까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만큼 혐오 현상에 대해서는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우선 간단하지만 본질적인 접근을 하면, 혐오는 미학적(aesthetic), 곧 감각학적 의미를 지닌 말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들을 정의하는 단어입니다. 배설물이 그 대표적 대상입니다. 우리는 시각적으로든 후각적으로든 그것을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동물의 사체나 상처의 고름도 우리의 오감은 아주 싫어합니다. 손톱으로 유리창을 빡빡 긁으면 청각이 그것을 혐오합니다. 아주 쓴 것은 미각이 거부합니다. 흐물흐물대거나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대상은 촉각이 경계합니다.

혐오가 본질적으로 감각적 차원의 개념이라는 것은 이 말의 영어 표현(disgust)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맛(gust)을 부정하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밥맛 떨어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듯 혐오의 감정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감각이 거부하는 것들과 밀접합니다. 그 가운데는 배설물이나 부패된 음식물처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혐오하는 것도 있고, 각 개인에 따라 개별적으로 싫어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늘 냄새를 아주 싫어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마늘 향이 나는 음식을 아주 좋아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차적 혐오감은 대상에 대해 즉각적이고 주관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종종 사회적 소수자나, 정치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나, 문화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에도 혐오의 현상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의 저변에 혐오감이 깔려 있으며 그것을 굳이 감추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경향까지 볼 수 있습니다.

비판은 성찰적이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각적 거부감, 즉 혐오감이 바로 상대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감각과 비판 사이에 사고의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싫다고 느낀 것을 사유의 여과 없이 비판의 이유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경고했던 ‘숙고하지 않는 삶’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판은 그 본연의 역할을 잃고 경멸, 모욕, 증오, 저주가 됩니다. 저주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주술적 속성을 지닌 행위입니다. 혐오의 감정이 극단에 이르면 비합리적 주술성을 띠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혐오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사 누스바움도 인간의 감정에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도식적 이분법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많은 믿음과 사고가 수반되지만, 혐오의 감정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혐오에는 자신이 거부하는 더러운 오염 물질로부터 ‘전염될 수 있다는 신비적 우려’가 수반되며, 자신은 순수하고 완벽할 수 있다는 ‘전형적으로 비합리적인 열망’이 잠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카를 포퍼가 “마술적 사회나 부족 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는 닫힌 사회”라 부르고, 각 개인의 이성적 비판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사회를 열린사회라고 불렀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감각적 인지에 대한 절대 믿음과 그것을 주술화하는 과정이 닫힌 사회를 만듭니다. 상대를 거부하는 ‘혐오의 전쟁’은 닫힌 사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혐오#밥맛 떨어진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