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크리스마스의 빛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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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하양.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빛깔입니다. 이맘때면 모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합니다. 하양은 다양한 상징을 품고 있습니다.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려 쌓일 때면 온 세상이 평온한 것 같습니다. 내리는 눈송이마다 부드러운 위안의 손길 같습니다. 쌓인 눈은 헐벗은 사람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하얀 솜이불 같기도 합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새하얀 붕대를 연상하게도 합니다.

 올망졸망한 마을의 집들을 덮은 눈은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프랑스 국기에서 영감을 얻어 파랑, 하양, 빨강의 ‘세 가지 색’ 3부작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작품에서 ‘하양’을 평등의 상징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평등의 실현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어려운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삶의 이상을 성탄절같이 각별한 때면 더욱 갈망하는 것입니다.

 빨강. 색의 여왕이라고도 하는 빨강 역시 많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탄절의 색인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일 겁니다. 사회·정치적으로는 형제애와 동포애를 상징합니다. 산타클로스의 옷과 모자가 빨강인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상품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빨강이 심장을 상징화하고 사랑을 의미한 것은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세 번째 작품 ‘빨강’에서 운명의 장난에 휘둘리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뜨거운 가슴이 곧 사랑의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때면 사랑의 의미를 상기하려고 합니다. 사랑이 ‘하트 모양으로 포개진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피어나듯 우리 일상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겁니다.

 하양과 빨강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빛깔이 있습니다. 초록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색이지요. 녹색 역시 다른 색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미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성탄절에만큼은 그 어원적 의미를 되뇌어 보고 싶습니다. 영어에서 그린(green)은 ‘성장하다(grow)’라는 말과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녹색은 미래를 향한 생명체의 신호입니다. 그래서 초록은 생장이고 성장이며 희망을 상징합니다.

 겨울은 결핍의 이미지를 지닌 계절입니다. 희망은 결핍의 시간에 찾아오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황량한 겨울에 보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녹색은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합니다. ‘시절이 황량하면 녹색이 희망이다’라는 서양 속담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먼 옛날 대홍수가 있은 후 비둘기가 물고 온 초록빛 올리브 이파리가 희망의 표지였듯이, 먼 미래를 이야기한 SF영화에서 황폐한 지구에 홀로 남은 폐기물 제거 로봇이 발견한 초록빛 새싹 역시 희망의 표지입니다.

 ‘하양’의 평등과 ‘빨강’의 사랑을 실현하는 길이 험난하다고 해도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삼색 가운데 초록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경제적 결핍과 정치적 혼돈과 도덕적 황폐함을 겪었던 한 해를 절망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면, ‘더 나은 삶’을 위해 한 발짝 내디딜 수 있습니다. 희망은 사실 ‘부정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부정어가 될 때 희망이란 말과 그 말로 하는 다짐의 의미와 효과는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성탄절#크리스마스#키에슬로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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