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균 기자의 교육&공감]엄마 수학능력 평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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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김희균 기자
김희균 기자
5년 전 방영된 EBS의 다큐멘터리 ‘마더 쇼크’를 보면 한국과 미국의 엄마를 비교하는 실험이 나온다. 실험실에서 어린아이에게 뒤죽박죽된 낱글자를 조합해 단어를 완성하도록 하고, 엄마는 옆에서 지켜보게 한다.

한국 엄마들은 아이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자 옆에서 단어를 말해주거나 순서를 어떻게 바꾸라고 알려주는 등 수시로 개입한다. 반면 미국 엄마들은 아이가 엉뚱한 단어를 만들어도 그저 지켜볼 뿐, 끝까지 문제 풀이를 도와주지 않는다.

실험이 끝난 뒤 인터뷰에서 한국 엄마들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를 풀지 못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빨리 하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가르쳐주고 아이가 맞혔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반면 미국 엄마들은 “늘 아이가 스스로 하도록 둔다”, “매번 방법을 알려주면 혼자 하는 방법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엄마들이 성취의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지난주 일선 초중고교에 ‘과제형 수행평가를 지양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을 보며 문득 이 실험이 떠올랐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교육부가 지난달부터 학교생활기록부에 수행평가 비중을 확대하도록 하자 당장 현장에서는 학부모 부담이 커진다는 불만이 나왔다. 특히 교사가 과제를 내주고 학생들이 이를 집에서 해결해 제출하도록 하는 ‘과제형’ 수행평가의 경우 사실상 ‘엄마 평가’라는 비판을 샀다.

과제형 수행평가로 인한 엄마들의 대표적인 골칫거리는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점. 수행평가를 위해 악기는 물론이고 줄넘기까지 과외를 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지인은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미술 수행평가 결과를 보고 당장 미술학원에 보냈다고 전했다. 아이는 ‘우주에서 하고 싶은 것을 그려 오라’는 수행평가에 검은 공간을 둥둥 떠다니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우주인을 그려 제출했다. 그러나 학교 인근 미술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미국 스페이스X사가 최근 개발한 우주 로켓을 그리거나, 태양계의 행성과 궤도를 자세히 그려놓고 이를 연구하는 우주인의 모습을 그려 제출했다. 교실 뒤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은 실력 차이가 아니라 사교육 격차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현실적 지표인 셈이다.

사교육이 고착화된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별개로 엄마의 과도한 개입이 수행평가에서 부작용을 키우는 경우도 있다. 한 기자는 초등 4학년 자녀가 ‘신선한 과일을 골라보고 기록하라’는 과제를 받아 오자 마트에 가서 사과와 배를 고르고 사진을 찍어 제출했다. 하지만 일부 엄마들이 당도(Brix) 측정기를 사서 시장과 마트 과일의 당도 비교, 수입 국가별 신선도 비교, 제철과일과 하우스과일의 차이 등을 프레젠테이션(PPT) 파일로 만들어 제출했다는 후문을 듣고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수행평가는 ‘창의성을 높이고 실생활 문제 해결력을 높인다’는 취지로 1999년 도입됐다. 그리고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 창의적인 교육을 하자는 뜻에서 올해부터 확대됐다. 취지는 참으로 좋다. 하지만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초등학교는 엄마가 다니는 학교”, “초등 성적표는 엄마 성적표”라는 말이 유행한 지 오래다. 엄마와 사교육의 손길이 없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 그리고 부작용을 더욱 키우는 일부 엄마의 과도한 개입이 수행평가를 괴물로 만들고 있다.

단기적인 해법은 학교에서 해결하는 ‘수업 과정형’ 수행평가를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 이상으로 늘리는 것이다. 과제 부담을 집으로 돌리지 말고, 대부분 학교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과제형을 지양하라’는 정도로 약하게 얘기해서야 과제형 수행평가가 확 줄어들 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보다 근본적인 해법은 엄마들 스스로 자녀의 수행평가에 대한 개입을 줄여야 한다. ‘잘된 결과물’에 집착하지 말고 자녀 스스로 방법을 찾고 학습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켜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당장의 결과물이 초라해 보여 엄마의 조바심이 커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자란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잘 알게 될 테고 그래서 자신이 진로를 설계해 잘 찾아갈 테고, 어느 조직에서든 좀 더 나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엄마 손을 빌리지 않은 덕분에 기발한 그림이 나왔을지 모른다. 혹은 모든 과일을 맛보겠다는 도전 정신이 커졌거나 과일 소믈리에 혹은 과일 감별 전문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엄마들이여, 혹시나 나의 적극성이 아이의 잠재력을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같이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 여기에 누가 봐도 엄마의 손을 탄 ‘우수작’은 교실 뒤에 전시하지 않는 문화를 교사가 만들어 주면 금상첨화일 테고.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ebs 마더 쇼크#수행평가#한국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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