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북경에서 온 전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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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외교 부서였던 총리아문.
청나라의 외교 부서였던 총리아문.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 논란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방해하는 중국의 언동이 동시 진행 중이다. 두 사안에 공통점이 있다면 각기 쌍방이 상대의 태도를 도발로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겪는 복잡한 심적 콤플렉스는 그 뿌리가 깊다. 한중일 삼국이 오랜 구체제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근대적 관계로 돌입하기 직전의 어느 하루에서도 그런 광경이 나타난다.

 1874년, 창덕궁 대궐.

 국왕과 영의정, 좌의정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제2의 임진란인가, 아니 정유재란에 이어 제3의 왜란이 오는가. 그 정보는 일본이 아니라 반대편 중국으로부터 왔다.

  ‘북경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영의정은 중국 정부에서 보내온 통보문의 내용을 주상(主上)에게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뢴다,

  ‘상국(上國)이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여겨 이렇게 먼저 알려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회신에는 정성을 다해 감사의 뜻을 써보내야겠습니다.’(승정원일기 1874년 6월 25일자)

 상국이란 청국을 뜻한다.

  ‘섬 오랑캐가 서양 오랑캐들과 더불어 교통을 한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우리가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정의 말처럼. 조선이 일본과 서양의 동향을 얻어듣는 것은 중국을 통해서일 뿐이다. 전란이 닥친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막 벗어난 22세의 국왕은 말한다.

‘우리나라는 본디 군사에 익숙하지 못한데 지금 군을 정비한다면 그 수준이 임진년에 못 미칠 것이다.’

 영의정은 조심스레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한다.

  ‘임진년 왜란에 우리 백성은 군대를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된 까닭에 처음에는 공갈로 겁을 주면 그냥 달아나 흩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섬 오랑캐를 겪은 뒤로는 전력이 비슷해졌고, 근년에는 양요(洋擾)를 겪어 서양놈들의 장단점을 파악했으니 오늘날 군사력은 임진왜란 당시에 비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의정은 옛말을 인용한다.

  ‘태평한 날이 오래되다 보면 사람들이 교만하고 나태하고 물러빠져 약해져서 마치 아녀자처럼 집 밖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전투에 관한 말이 나오면 목을 움츠리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귀를 막고 안 들으려 한다.’

 그러면서 ‘이는 영락없는 이 시대의 병폐인데, 더 심해질까 걱정입니다’라고 토로한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통보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조선정벌론은 수시로 고개를 들고 있었고, 다음 해 일본 군함이 조선 해역에서 무력충돌을 유도하면서 결국 강화도조약을 관철시키기에 이른다.

 중국이 보내온 그 문서의 어감이 어떠하더냐고 국왕은 묻는다. 영의정은 다소 흥분한 어조로 답한다.

  ‘총리아문(總理衙門)이 우리나라에 알리고픈 일이 있으면 그것만 언급하고 그칠 일이지 왜 통상 문제 등을 거론하며 마치 공갈치고 꼬드기듯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총리아문은 지금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청나라의 정부 부서다. 중국이 왕조시대의 풍습을 오늘에 되살리듯 고압적 자세를 취하건 말건, 지금 한국 국회의원이 그 옛날 북경으로 향하던 사신처럼 자청하여 거기 동조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수구(守舊)라 할까.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총리아문#한중일#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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