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62>서로 달라도 함께 빛나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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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정물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정물화’.
로마 가톨릭과 절대군주의 후원을 받았던 17세기 유럽 미술은 화려하고, 입체적이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훼손된 가톨릭의 권위를 회복하고, 강화된 왕권을 과시하고자 미술은 형식과 구성이 대담해졌지요.

당대 미술가들은 시대의 예술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598∼1664)도 마찬가지였어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강렬함과 생동감을 존중했지요. 동시에 자신만의 미학적 개성을 확보하고자 분투했고, 장엄하고 침착한 예술로 독자성을 인정받았지요.

화가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예술 활동 거점은 무역 도시 세비야였습니다. 신대륙과 교역으로 활기가 넘쳤던 이곳에서 재빨리 예술적 명성을 얻었지요. 엄숙함과 신비함이 공존하는 종교화 덕분이었어요. 뛰어난 기량으로 기도와 명상의 고요한 순간에서 기적과 순교의 극적인 사건까지 종교적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었거든요. 당시 교회와 수도원은 깊은 종교성이 느껴지는 그림을 높은 비용을 감수하며 계속 의뢰했습니다.

당대 최고 종교 화가라고 거룩한 성인과 특별한 수사만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화가는 레몬과 오렌지, 물잔과 장미 등 평범한 사물이 등장하는 정물화도 몇 점 남겼어요. 여러 개 그릇이 있는 그림도 그중 하나입니다. 화가 고유의 엄격한 구성과 절제된 표현이 돋보이는 정물화였지요.

길고 좁아 탁자 같기도 하고 선반 같기도 한 갈색 공간에 그릇들이 한 줄로 놓여 있습니다. 그림 중앙에 높이와 빛깔도 차이 나는 물주전자와 꽃병이 보입니다. 한편 그림 양끝은 재질과 장식의 정교함 정도가 다른 술잔과 물주전자가 차지했습니다. 그림 속 그릇들은 손잡이 높낮이와 방향까지 모두 다릅니다. 그럼에도 깊은 어둠과 온화한 빛 속에서 저마다 거룩한 존재감을 충돌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웃한 사물과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제자리를 지키는 정물들이 전하는 차분함 때문이겠지요. 그림 가장자리에 배치된 모양과 느낌이 흡사한 둥근 주석 접시가 주는 안정감 때문이겠지요. 형태와 색깔, 질감과 쓰임이 다른 사물들이 일렬로 늘어선 그림의 첫인상은 질서정연함입니다. 차이 나는 생각과 신념에서 비롯된 격한 목소리와 위험한 행동이 이어졌던 요 며칠, 서로 다른 정물들이 함께 빛나는 그림에서 혹한이 지나고 우리가 함께 맞을 봄에 대한 무언의 조언을 구해봅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17세기 유럽 미술#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정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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