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59>평범한 날의 승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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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이탈리아 출신 존 싱어 사전트(1856∼1925)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았고, 스페인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고국인 미국을 무척 사랑했고, 예술적 명성은 영국에서 얻었지요. 하지만 어디서든 화가는 초상화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인상주의 미술이 한창이었습니다. 화가는 관습적 주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초상을 그리면서도 동시대 미술을 예의 주시했습니다. 교류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빛의 표현에 관심도 가졌지요. 나무가 울창한 숲, 아침 산책길, 돌풍 불어오는 들녘 등을 야외에 나가 직접 제작하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바람이 일렁이고,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완성된 그림은 인상주의 미술과 예술적 결이 달랐습니다.

화가는 초상화로 주목받던 시기에 황급히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프랑스 사교계 여성을 그린 초상화가 스캔들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어요. 실험적 표현과 퇴폐적 분위기의 초상화에 쏟아진 미학적, 도덕적 비난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거지요.

영국은 유럽에서 초상화 전통이 깊은 나라입니다. 이런 곳에서 자신을 새롭게 알려야 했으니 심적 부담이 컸을 것 같습니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영국 미술계 진출을 위한 야심 찬 데뷔작이었습니다. 그런데 화가는 소녀들을 그림 주인공으로 선택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렸던 열정적인 스페인 무희나 화려한 백작 부인들과 달리 평범한 꼬마들이었지요.

해질녘 어스름과 중국식 등불, 만개한 꽃과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전하는 평온함은 예술적 철저함의 산물이었습니다. 화가는 매일 낮이 밤으로 바뀔 무렵 미술 도구를 챙겨 야외에 나갔습니다. 어둠과 함께 아련해지는 세상 빛을 날카롭게 포착해 신비롭게 재현하려 했습니다. 그 사이 여름은 가을로 변했고, 정원 꽃은 조화로 대체되었습니다. 직사각형 캔버스도 왼편을 잘라 완성 최종 단계에서 그림은 정사각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치열하게 그린 평범한 일상은 꼭 필요한 순간 화가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어요. 그림은 가장 영국적이라는 테이트 갤러리에 소장되었고, 화가도 영국 화단의 자랑스러운 일원이 되었지요.

고단했지만 보잘것없던 하루가 지나고 또 새날이 밝았습니다. 피곤함과 허전함이 교차하는 아침,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림에 위로를 받습니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을 오늘을 감당할 만큼의 힘을 얻고, 흩어진 일상을 다시 차곡차곡 모을 정도의 용기도 내봅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존 싱어 사전트#인상주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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