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나라는 외적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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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메이지 유신 주역들 우리에겐 元兇, 일본엔 영웅
쇼인과 료마 ‘젊은 희생’… 군국주의 뿌리 삼는 아베… 국내선 ‘경제 살린 지도자’
좌우 가릴 것 없는 ‘公의 부재’… 안보 위기보다 치명적 亡國病

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지난달 중순에 찾은 일본 규슈의 나고야(名護屋). 중부 혼슈의 나고야(名古屋)와는 다른 이곳은 역사적으로 한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장소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곳에 거대한 성을 쌓고 조선 출병을 지휘했다. 그만큼 한국과 바다 거리가 가깝다. 지금은 성벽만 남은 성터에 올랐다. 탁 트인 바다에 5세기 백제 무령왕(武寧王)이 태어났다는 섬이 보였다. 무령왕은 아키히토 일왕이 피가 섞였다고 했을 정도로 고대 일본 왕가와의 관련설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고대부터 이곳이 한국과의 교통 요지였다는 점이다.

성터 아래엔 나고야성 박물관이 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치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를 주제로 상설 전시실을 운영한다. 한국어 가이드북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돼 있다. 그러나 박물관의 팸플릿에선 ‘반성’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그 전쟁을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를 일시적으로 단절시킨 불행한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7일 한일 양국의 첫 정상회담에서도 드러났듯, 과거사를 보는 두 나라의 시각은 다르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근세를 보는 양국의 시각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


혼슈 서남단의 야마구치현 하기시(市). 일본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키운 스승 요시다 쇼인의 사숙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쇼인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일본 근대화를 이끈, 우리에겐 원흉(元兇)이지만 일본인에게는 ‘영웅’인 인물을 많이 길러냈다. 막부(幕府) 체제에 대항했던 쇼인이 옥중에서 쓴 유수록(幽囚錄)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근거가 된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쇼인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됐다. 일본인들은 쇼인을 신격화하는 신사(神社)를 세웠다.

쇼인 신사 입구에는 얼핏 지나치기 쉬운 기념비가 하나 있다. ‘삿초동맹’을 협의했던 비밀 회합 장소였다는 비석이다. 삿초동맹은 1866년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과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이 맺은 정치군사 동맹.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낸 역사적 사건이다. 앙숙처럼 지내던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을 이끌어 낸 인물이 바로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사카모토 료마다. 료마는 동맹을 성사시킨 이듬해 암살당한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 기념비의 문구를 쓴 사람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아베의 지역구이자 고향이 바로 이곳 야마구치현. 아베가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다. 이쯤 되면 아베의 군국주의 성향이 어디서 발원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베는 주변국에서 보면 ‘큰일 낼 위험한 인물’이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인에겐 ‘아베노믹스’로 자식들 일자리 걱정을 없애준, 경제를 살린 지도자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은 아시아 각국에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인에겐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해준 자랑스러운 역사다. 거기엔 사카모토 료마나 요시다 쇼인, 쇼인의 제자들처럼 젊은 나이에 목숨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우리도 냉정하고 차분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극일(克日)의 출발이다.

영국 보수주의 연구가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보수주의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애국주의를 꼽는다. 거창한 애국이 아니어도 좋다.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이 사(私)보다 공(公), 계파 이익보다 국익을 앞세워 희생을 보인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사유화’는 그 편린일 뿐이다.

좌(左)라고 다르지 않다. 입으로는 온갖 고상한 얘기를 다 떠들고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민망한 불·탈법을 저지른 이들이 이미 장관(급) 자리를 꿰찼다. 누가 뭐라고 하든 앞으로도 내각에 입성할 것이다. 오죽하면 현 정부 고위 당국자가 사석에서 “군인은 10명 중 8명, 교수 출신은 10명이면 10명 다 문제가 있다”고 했을까.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온 군인과 교수들이 들으면 통탄할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6·25 이후 최고 위기’라고 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외교안보 위기보다 치명적인 게 좌우 가릴 것 없는 공(公)의 부재라고 나는 본다. 나라는 외부의 적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지도자들의 무능과 사욕 추구, 그에 따른 국가 기강 해이로 성벽이 먼저 허물어진 뒤에야 백성들은 이미 성문 앞에 도달한 외적의 말발굽 소리를 듣게 된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일본 규슈 나고야#임진왜란#아베#보수주의#6·25 이후 최고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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