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병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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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윤동주(1917∼1945)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여러 날 입원해 있는 걸로 보아, 여자는 병세가 중한 듯하다. 화자는 멀찍이 떨어져 그를, 미지의 아픔을 보듯 본다. 병원 뒤뜰은 볕 아래 외려 고적하고 어둡다. 그는 눈으로, 신음하듯 말하는 중이다. 나는 왜 이렇게 아픈가. 나는 왜 이렇게, 아프고 싶은가.

그는 아파서 병원에 왔지만 의사는 그에게 병이 없다고 한다. 의사가 모르는 병은 마음의 병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이 병을 앓는 건 아니다. 시대의 어둠이든 인간의 불우든, 아픈 것을 보면 저도 몰래 통증을 느껴 걸음마다 피를 흘리는 이 젊은이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 연 말미에는 판이 돌다 튀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모르는 이의 병세를 함부로 요량하고 있지 않나 하고 스스로 놀라, 그는 병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제 병을 엉겁결에 내놓는 중인 건 아닐까. 이 당황과 무마의 순간에 깃든 섬세한 떨림은, 청진에 잡히지 않던 그의 깊은 환우가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그녀의 아픔에 제 것을 포개 같이 앓을 수 있게 된다.

이 시는 이렇게, 한 고결한 영혼의 정신적 출혈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나라 잃은 시대에 외세는, 여리되 곧고 아파서 죄 없는 이 젊은이를 잡아 가두고 고문하여 죽였다. 다시 와선 안 될 시대이고, 다시 행해져선 안 될 야만이었다.

이영광 시인
#병원#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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