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암소가 호랑이를 이기는 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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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592, 선조25) 여름 6월 19일, 내가 왜적을 피해 재산(才山) 동쪽 금곡리(金谷里)에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마을 사람 김만손(金晩孫)의 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이때 호랑이가 포효하며 나타나 송아지를 물어가려 하자 여러 마리의 암소가 사방에서 쫓아와 덤벼들었다. 호랑이가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송아지를 내버려 둔 채 도망갔다.

배용길(裵龍吉, 1556~1609) 선생의 ‘금역당집(琴易堂集)’ 제4권에 실린 ‘의로운 어미 소 이야기(義?說)’입니다.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힘썼으며, 뒷날 조정에서 왜적과 화친하자는 논의가 있자 상소를 올려 화친의 부당함을 아뢰면서, 임금이 직접 정벌에 참여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울 것을 청하셨던 분입니다.
재주라고는 들이받는 것밖에 없을 어미 소들이 새끼를 지키고자 힘을 합쳐 저 무시무시한 호랑이를 물리쳤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크게 탄식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사람이 되어 오히려 금수만도 못하단 말인가.(嗚呼! 人而反不如禽獸乎?)” 탄식의 이유는 곧 밝혀집니다.

오늘날 동래(東萊)가 왜적에게 함락될 때 병마절도사가 구원하지 못하고 도주하자 주현(州縣)의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났으니, 이 암소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싸운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이빨을 검게 물들인 왜적들이 20여 일 만에 왕성(王城)을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곧장 쳐들어 간 것도 당연하다. 아, 사람들이 서로 헐뜯고 비방할 때면 반드시 ‘소나 말이 사람의 옷을 입었다.’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하는 짓은 오히려 소나 말에게도 부끄러우니 어찌 통탄스럽지 아니한가.(嗚呼! 人之相訾謷者, 必曰‘馬牛襟裾’, 而所行反有愧於馬牛, 豈不痛哉?)

짐승이 사람의 옷을 입은 것처럼 형편없다고 상대방을 조롱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고 있으니 당시의 위정자들에게 깊은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열강들의 협박과 공세는 어떤가요? 임진왜란 때보다 더 헤쳐 나가기 어려운 시련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한 마리도 아니고 떼로 덤벼드는데 그 앞에 선 우리는 과연 어떤 암소가 될 것인지.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김만손#배용길#금역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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