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담대한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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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서도치(徐道致)는 옛날 우리 동네 사람이다.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며 병 치료에 좋다는 약을 만방으로 구하였다. 어떤 사람이 별다른 처방은 없고 오직 천년 묵은 꽃뱀이 가장 좋다고 하자 서도치가 집 근처 마을의 방축을 무너뜨려 꽃뱀을 잡아서 약으로 썼는데 아버지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뱀이 집으로 날아들었다. 온 식구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서도치가 집안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지 마라. 내가 마땅히 죄를 순순히 받을 것이다.”

장복추(張福樞·1815∼1900) 선생의 ‘사미헌집(四未軒集)’ 권6 ‘척유록(摭幽錄)’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척유록’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숨겨진 행적을 찾아 기록하여 세상에 알리는 글’입니다. 서도치라는 사람이 꽃뱀을 잡아 약으로 써서 아버지의 병이 나았는데, 이번에는 죽은 뱀의 원수를 갚고자 큰 뱀이 집으로 날아들었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벌벌 떨고 있을 때 서도치가 담담히 나섭니다. “내가 그 죄를 받으마.”

서도치가 뱀에게 말하였다. “천년 묵은 꽃뱀을 죽인 것은 실로 자식 된 자의 절박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나는 너에게 원수가 되었다. 암컷은 수컷을 위하여, 수컷은 암컷을 위하여 복수하는 것은 이치로 보아 진실로 당연하다. 너는 너의 원수를 갚고 나는 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는 것, 이 모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니,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다(汝復汝讎, 吾瘉吾父病, 皆爲所當爲, 則雖死無憾).” 그러고는 방 한가운데 누웠다. 뱀이 서도치의 온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칭칭 감더니, 조금 있다가 문득 풀고 떠나가 버렸다.

나의 정의가 남과 부딪힐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각자 할 일을 할 뿐 죽어도 유감이 없다는 주인공의 담대함이 서늘하면서도 감동적입니다. 장복추 선생의 마무리입니다.

만약 그가 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뱀을 해치려고 들었다면 자신도 죽었을 뿐 아니라 곧바로 온 가족이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을 당했을 것이다. 이치에 따라서 처리한 것이 모두 정도를 얻었으니, 이 때문에 흉악하고 무지한 뱀이지만 오히려 감화될 수 있었다. 그 덕에 자신의 몸도 온전하고 가족도 지키게 되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서도치#장복추#사미헌집#척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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