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부끄러움에 대처하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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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인정상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원래 누구든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도리를 어겨가면서 본성과 어긋나게 행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 여기에는 남들이 모르는 깊은 사정과 숨은 뜻이 있음이 분명하다.(事之大不近於人情者, 自非忍心逆理拂人之性. 然而爲之者, 是必有深情隱旨而人未之知也)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선생이 쓰신 ‘한조불록기신론(漢祖不錄紀信論)’의 첫머리입니다. 인정상 그렇게 하면 안 될 일을 한다면 여기에는 틀림없이 속사정과 숨은 뜻이 있다면서, 한고조(漢高祖)가 기신(紀信)의 공을 녹훈해 주지 않은 일을 예로 드십니다.

기신은 한(漢)나라의 무장입니다. 초(楚)나라가 고조를 형양(滎陽)에서 포위하였을 때 고조로 위장하고 초나라에 거짓 항복을 하였죠. 고조는 그 틈에 도망칠 수 있었지만 기신은 격분한 초나라 항우(項羽)에 의해 불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신은 고조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요, 나라로 치면 건국 공신인 셈입니다. 그런데 훗날 천하를 평정한 고조는 아무리 사소한 공에도 모두 상을 내리면서 기신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보상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속사정이 있는 걸까요.

고조가 기신을 봉(封)해 주지 않은 것은 잊어버리고 저버린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나머지 그 일을 거론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뱀(蛇)이었던 시절은 숨기고 지금 용(龍)이 된 것만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 그러나 형양에서의 일을 어찌 숨겨야만 하겠는가. 이런 일이 아니고서는 왕업(王業)을 이루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천명(天命)을 받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다. 또 기신과 같은 신하가 있었는데도 그 충성스러운 공을 모른 체해 버린다면 신하된 자들을 어떻게 권장할 수 있겠는가. 숨겨서는 안 될 일을 숨기고 모른 체해서는 안 될 일을 모른 체하였으니, 여기에서 고조는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고 할 것이다.

성인(聖人)도 허물이 있지만 바로 고치면 만인이 우러러본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솔직히 고백하고 고친다면 성인(聖人)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성인(成人)은 될 것입니다. 잘못을 감추고 변명하기에만 급급한 사람은 소인(小人)으로 남을 뿐입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한조불록기신론#계곡 장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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