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김지영]검증된 추억 쌓는 ‘여행 예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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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원스토어 eBook사업팀 매니저
김지영 원스토어 eBook사업팀 매니저
지난여름, 기록적인 폭염을 피해 러시아 동부로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작은 항구 도시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으로 유명하다. 국적기로 2시간 30분, 외국 항공으로 북한 상공을 지나면 2시간이면 닿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도 한다. 물가도 저렴해 잘만 하면 국내보다도 저렴한 가격에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게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급격히 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전망 명소인 ‘#독수리전망대’를 검색하면 같은 장소에서 같은 포즈로 찍은 인증 샷들이 주르륵 뜬다. 난간 모서리에 걸터앉아 금각교를 바라보는, 아름답지만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사실 이곳은 안전펜스를 벗어난 곳으로 갑작스러운 돌풍이 잦아 사고 위험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추락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한다. 이 위험한 유행은 다름 아닌 미디어로부터 비롯됐다. 특정 여행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취한 포즈를 따라 하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는 식당들의 리스트가 있다. 대부분이 방송에 소개된 곳들로 메뉴판부터 한국어가 제공된다. 몇 군데는 기다림을 인내하고 방문해 보았지만 금쪽같은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굳이 웨이팅에 할애할 만큼이었는가는 의문이다.

바야흐로 여행 예능 전성시대이다. 과거 다큐멘터리 소재에 지나지 않았던 여행이 예능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여행을 접목한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노년의 여행, 지식 여행, 가성비 여행 등 여행 예능은 쿡방을 넘어 방송계의 새로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퍽퍽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쉴 곳을 찾는다. 자막의 친절한 가이드와 함께 이국땅의 풍광을 즐기는 데에 드는 비용이라고는 와이파이와 맥주 한 캔이면 족하다.

분명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경계하고 싶은 것은 미디어에 노출되는 여행의 모습이 마치 그곳을 여행하는 ‘모범답안’처럼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명인들이 극찬한 꼭 가봐야 할 곳, 인생 샷 포인트, 꼭 먹어야 할 것들로부터 우리는 대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기다림을 인내하며 검증된 추억을 쌓는 것이리라. 물론 방송을 따라 여행을 계획하면 정보 수집은 수월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순례’에 가까워진다.

획일화된 여행 코스, 얼굴만 갈아 끼운 것 같은 인증 샷들과 맛집 리스트 순회. 미디어가 여행을 정형화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보와 자유의 범람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 ‘덜 틀릴 수 있는’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일까. 여행조차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검증된 길로만 내모는 것은 아닐까. 시험이 아니다. 여행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뇌리에 남는 것은 결국 미션 수행하듯 완벽하게 마무리한 정답 같은 여행이 아니라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걸어간 흔적이다. ‘아, 거길 가봤어야 했는데’나 ‘아, 그걸 먹어봤어야 했는데’가 아니라, ‘그 여행 참 좋았다’는 단지 이 느낌 말이다.
 
김지영 원스토어 eBook사업팀 매니저
#블라디보스토크#여행 예능#획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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