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거덜 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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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의혹과 비리가 터져 나온다. 나라가 거덜 나지 않은 게 오히려 용하다 싶다.

 쫄딱 망했을 때 사람들은 ‘거덜이 났다’고 한다. ‘거덜’이 뭐지? 무슨 물건쯤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아니다. 조선시대에, 사복시(司僕寺)에 속해 말을 돌보고 관리하던 종이다.

 사극의 가마 행렬을 한번 떠올려 보자. 이때 “쉬∼ 물렀거라. 대감마님 행차시다”라며 목청을 길게 빼는 이들이 바로 거덜이다. 얼마나 우쭐거렸기에 그들이 타는 ‘거덜마’에 ‘걸을 때 몸을 몹시 흔드는 말’이라는 뜻까지 생겨났을까.

 거만스러운 태도를 일컫는 ‘거드름’도 거덜에서 파생한 말이다. 상전의 위세를 믿고 남 앞에서 으스대거나 허풍을 떠는 것을 ‘거드름 피운다’고 했다. ‘들때밑’은 세력 있는 집안의 오만하고 고약한 하인을 이른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과 닮았다.

 ‘거덜 나다.’ 거덜에 ‘나다’가 붙은 모양새다. 재산이나 살림 등이 여지없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거덜 나다’가 망했다는 뜻이 됐을까. 거덜은 생활이 쪼들리는데도 높은 양반 옆에서 허세를 부리다 가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그래서 ‘거덜 났다’는 것은 거덜처럼 무일푼이 되었다는 말이다. 요즘은 ‘옷과 신 등이 닳아 떨어지거나’ ‘하려던 일이 여지없이 결딴나는 것’ 등으로 의미가 확산됐다.

 ‘결딴나다’는 거덜 나다와 뜻이 닿아 있다. 어떤 일이나 물건 따위가 망가져서 어쩌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지만 ‘살림이 망하여 거덜 난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한데 이 말을 ‘절딴 나다’ ‘절단 나다’ ‘결단 나다’로 잘못 쓰는 이가 많다. 절딴은 글꼴이 결딴과 비슷할 뿐 사전에조차 올라 있지 않다. ‘결단(決斷)’ 역시 발음이 ‘결딴’으로 나는 까닭에 헷갈리겠지만 당연히 의미가 다르다. ‘절단(切斷)’은 한자에서 보듯 자르거나 베어 끊는 것을 말한다.

 ‘살림이 거덜 나면 봄에 소를 판다’는 속담이 있다. 생활이 쪼들려 막다른 처지에 이르게 되면 아무리 긴요한 물건이라도 꺼리지 않고 판다는 뜻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대한민국의 안정과 미래, 위신이라는 귀중한 소를 팔지 않으면 안 되는 궁색한 처지로 이 나라를 몰아넣었는지.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최순실#국정 농단#거덜 나다#거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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