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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의 ‘직필직론’]국립발레단의 ‘나비부인’, 그리고 왜색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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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의 ‘직필직론’]국립발레단의 ‘나비부인’, 그리고 왜색 논란

동아일보입력 2014-08-14 03:00수정 2014-08-2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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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교수·언론학
문화와 예술은 관용이다. 우리는 문화와 예술에서 관용을 배운다. 관용속에서 그들은 발전한다. 문화와 예술의 매력은 남의 세계를 통해 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것. 남과는 다른 사실들을 충분히 알고 인정하는 것만큼 인생에서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남과 다른 나라의 생각과 감정, 경험에 관한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인내 속에 보고 들으면서 나의 세계를 키울 수 있다. 그러한 관용의 바탕 위에서 국민의 창의력이 생기고 문화와 예술이 융성한다.

○ ‘왜색’에 예민한 사회

문화나 예술이 곧 관용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에서 ‘왜색(倭色)’은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문화 현상이나 예술 작품도 왜색이란 낙인이 찍히면 그 가치와 생명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고전이든 현대든 일본 특유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은 상당하다. 왜색의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독단적이고, 왜색으로 몰아가는 수단과 방법이 악의적이라 할지라도 ‘왜색’이란 낙인은 대중을 사로잡는 호소력이 매우 강하다. 사실 왜색 짙은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이나 역사 인식이 잘못됐다고 매도하던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졌다. 과거사나 현재의 일본 정부에 대한 감정과는 관계없이 일본 문화와 예술을 수용하는 국민의 태도는 그만큼 성숙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왜색에 관해 예민하다. 이성보다는 감정적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일단이 최근 발레에서 드러났다.

지난달 국립발레단은 내년 3월 ‘나비부인’을 공연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3주 만에 취소했다. 지금까지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언론이 왜색이 짙은 작품이어서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비부인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국립발레단 강수진 단장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 강 단장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로 세계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그는 아름다운 발레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이지러진 발톱 사진으로 더욱 유명해진 인물. 강 단장은 지난달 인스브루크 발레단과 함께 나비부인 무대에 올라 국내에 이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관객들은 왜색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했다고 한다. 기모노를 입고 춤추는 작품을 왜 국립발레단이 공연하는지 의문을 표시했다는 것이 언론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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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나비부인의 모태는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다. 1904년 초연된 나비부인은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했던 미군 장교와 일본 게이샤의 슬픈 사랑을 그린 작품. 겨우 15세의 게이샤는 장교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으나 배신을 당한 끝에 자살하고 만다. 지난 110년 동안 이 비극 오페라는 숱한 논란에 휩싸였다.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 취향과 일본풍을 선호하는 풍조인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유럽인들의 서양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미국 제국주의 찬양, 그리고 동양 여성에 대한 비하 등이 작품에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 예술은 예술일 뿐

논란에서 보듯 나비부인은 일본의 민족 정서나 문화를 찬양하거나 미화하는 작품이 아니다. 일본이 배경일 뿐인 사랑이야기이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나비부인이 일본이나 일본 여자를 열등한 존재로 묘사했다고 분노했다. 2000여 회나 나비부인을 연기했던 일본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는 “작품 속 일본 문화와 관습은 단순히 극단적으로 이상한 것을 넘어 격분케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나비부인은 수많은 오페라 가운데 여섯 번째로 전 세계에서 많이 공연된다. 나비부인이 불후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어떤 논란과도 무관하게, 단지 청중의 감성을 다스리는 나비부인 ‘초초상’의 음악에 있다고 한다. ‘어느 갠 날’ ‘사랑의 이중창’ 같은 아리아가 아름다운 오페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숱하게 무대에 올려졌다. 2009년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했으며 올봄에도 사설 오페라단이 공연했다.

발레 나비부인도 마찬가지다. 1995년 호주에서 나비부인을 처음 발레로 만들었던 스탠턴 웰치는 “‘로미오와 줄리엣’같이 유명한 사랑이야기여서 끌렸다”고 말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강수진과 국립오페라단이 춤추는 나비부인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왜 유독 발레 나비부인이 왜색이란 비판을 받아야 하고, 비판을 감당하지 못해 공연이 취소돼야 하는가. 일본 옷을 입고 춤춘다 해서 발레를 막는다면 일본 옷을 입고 노래 부르는 오페라도 막아야 하는 것인가. 예술성이 모자란다면 모르겠으나 왜색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연을 취소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니면 정치적 이유가 있는가.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이 20세기에 가장 정치 성향이 짙은 발레단으로 알려진 것처럼 발레도 정치와 밀접하다. 정치의 도구라고도 한다. 누가, 극도로 나쁜 한일의 정치적 관계를 들먹이며 공연이 정부를 자극할 수 있다고 외국 생활을 오래한 강수진 단장을 겁주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아도 예술은 예술일 뿐이다. 나비부인은 일본 정부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도구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반일 감정이 거세도 문화·예술에 대한 국민의 도량이 그렇게 좁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기모노을 입고 춤춘다고 해서 세계적 작품을 배척하는 것은 한류를 수출하는,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나라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 무엇이 두려운가. 예술성이 부족하면 보완하면 된다. 국립발레단이 예정대로 나비부인을 공연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것이 문화와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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