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원주]‘뉴스 나와야 징계’… 체육회는 왜 존재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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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주 스포츠부 기자
이원주 스포츠부 기자
선수촌에서 도망쳐 보기도 했다. 경찰에 고소를 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졌던 심석희 선수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언론이다. 전 유도선수 신유용 씨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리려 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2차 피해에 노출된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 언론이나 SNS에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할 경우 가해자는 솜방망이 징계를 받고 피해자는 계속해서 고통받는 구조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본보가 11일 단독 보도했던, ‘성추행 쇼트트랙 코치의 징계를 감경한 선수위원회 속기록’에도 이런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체육계에서는 “특수한 사례다”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럼 이런 사례들은 어떨까. 지난해 5월 한 고등학생 승마 선수가 “지도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며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에 신고했다. 대한체육회는 이를 직접 조사하지 않고 대한승마협회에 조사하라며 내려보냈다. 6개월 뒤 승마협회는 대한체육회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했다”고 보고했다. 징계는 없었다.

이런 사례도 있다. 2017년 5월 한 대학교의 양궁 선수가 “동료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발언을 들었다”며 대한체육회에 신고하는 동시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안은 현재까지도 조사가 끝나지 않고 있다. 대한체육회 측은 “항소심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법원 판결 전까지 조사를 중지했다”고 설명했다.

승마 선수가 승마협회가 아닌 대한체육회에 신고한 이유는 승마인이 아닌 상급단체 조사 담당자들이 조사해 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양궁 선수가 법원 소송과 별도로 대한체육회에 신고한 이유는 긴 시간이 걸리는 법적 절차와 별도로 가해자가 조사와 징계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한체육회는 이런 선수들의 ‘알려지지 않은 간절함’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 관련 내용이 알려지고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면 달라진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조재범 전 코치를 영구 제명하는 징계를 14일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유도회 역시 19일 이사회를 열어 신유용 씨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코치를 징계할 방침이다. “신 씨가 SNS에 해당 내용을 올린 지난해 말부터 사안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법원 판결을 기다리느라 징계를 미뤘다”는 지금까지의 태도와 다르다.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쉴 틈 없이 터지는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 뉴스를 보면서 체육계의 자정 능력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떤 경우에도 이를 성역 없이 집행하겠다는 체육인들의 의지다. 지금 체육계가 해야 할 건 대책 발표뿐만아니라 다시는 부당하게 징계를 낮추는 회의록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실천 의지’를 다잡는 일이다.
 
이원주 스포츠부 기자 takeoff@donga.com
#성범죄 피해자#체육계#성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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