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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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문화부 차장
정양환 문화부 차장
늦은 밤 TV를 틀면 가끔 기시감이 찾아온다. 별건 아니다. 채널이 많아 같은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수십 번씩 마주해서다. 보통은 리모컨을 누른다. 그런데 꾸역꾸역 보게 되는 작품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할리우드 첩보스릴러 ‘본 시리즈’는 꼭 넋을 놓는다.

희한한 건,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목도한다. 몹쓸 기억력. 며칠 전 1편 ‘본 아이덴티티’가 그랬다. 과거를 잊어버린 제이슨 본(맷 데이먼). 어렵사리 자기 집을 찾아내 벨을 눌렀다. 빈집인 건 당연지사. 옆에 있던 마리(프랑카 포텐테)가 이런 농을 던진다.

“You are not here(당신은 여기 없네요).”

깜짝 놀랐다. 실은 똑같은 말을 해줬던 스님이 있었다. 일명 ‘저잣거리 스님’으로 불리는 법현 스님이다. 지난해 선원을 찾았을 때, 환하게 웃으며 이처럼 알쏭달쏭한 말을 던졌다. 솔직히 형이상학에 약하지만, 당시 말씀은 귀에 쏙 들어왔다.

“기껏 찾아왔더니, 없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육신이 왔다고 함께 있는 게 아니죠. 이렇게 인연을 맺었지만, 아직 서로 잘 모르잖아요. 본질은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조각들이 모여서 이뤄집니다. 그걸 조금씩 알아가며 존재의 가치도 올라가죠. 전 지금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은 겁니다.”

어디에 머무르는지로 깨닫는 존재의 가치라…. 그런 뜻이라면, 법현 스님만큼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도 흔하지 않다. 스님이 2005년 연 대한불교태고종 열린선원은 서울 은평구 역촌중앙시장에 있다. 50년도 넘은 재래시장은 딱 봐도 세월의 ‘짠내’가 시큼하다. 요즘 서울에선 희귀한 지물포나 방앗간에 묻혀 찾기도 힘들다. 심지어 바로 옆에 교회도 있다.

“처음엔 만류도 컸죠. 세상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에서 불도를 닦을 수 있겠느냐고요. 하지만 종교가 뭡니까. 사부대중에게 법을 전해야지요. 그렇다면 시장은 최고의 포교 터죠. 교회와도 사이가 무척 좋습니다. 해마다 12월엔 ‘성탄절 축하’ 현수막도 내거는 걸요. 껄껄.”

물론 자기 자리를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청년들은 대다수가 앞길을 고민한다. 법현 스님도 엇비슷했다. 대학 때부터 출가를 고민했지만 가족이 걸렸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살림. 장남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도저히 부모님을 저버릴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고종은 결혼도 봉양도 가능하거든요. 요즘 교수들을 만나면 ‘학생들 자존감이 떨어져 있어 걱정’이란 얘길 합디다. 그럴 땐 짐짓 꾸짖습니다. ‘당신부터 정신 차리시오. 선생이 긍지를 지녀야 제자도 힘을 받지’라고. 방법은 찾으면 나옵니다. 그럴 맘의 자세가 되어 있는가가 문제예요.”

삶은 참 까다롭다. 지금 서 있는 인생도 가끔 뒤통수를 친다.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도 우리는 여기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땐 방법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는 수밖에.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이런 때도 저런 때도 그저 따땃이 해라./더구나 추운 때는 따슨 것이 제일이여./찬바람 맞고 다니다가도/바람벽에 볕 들먼 좋지 않드냐?’(법현 스님의 책 ‘그래도, 가끔’에서)

그래, 결국 옷깃을 여미는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건 간에. 둘러보면 분명 손잡아 줄 이가 있다. 그렇게 한발씩 내디뎌야 한다. 또 한 해가 시작됐다.

정양환 문화부 차장 ray@donga.com
#영화 본 시리즈#법현스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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