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해에게서 소녀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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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문화부 기자
정양환 문화부 기자
2009년 1월, 꽤나 추웠던 날이다.

가요 담당 기자가 된 뒤 운 좋게 데뷔 1년쯤 된 걸그룹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나름 첫 앨범도 뜨거웠던 팀인지라 신나서 달려갔지만, 약간 첫인상이 실망스러웠다. 10대라 그런지 딱딱한 모범답안만 내놓아 재미가 없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아직 점심 무렵인데 연일 스케줄이 빡빡했는지 살짝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뭔가 더 끌어내지 못하는 능력 부족을 자책하다가 반전이 일어난 건 ‘음악’ 얘기에 집중하면서부터였다. 퀭하던 눈빛이 반짝반짝 되살아나더니 2집에 담은 노력과 애정을 마구 쏟아냈다. ‘디어 맘(엄마에게)’이란 노래를 녹음하며 모두 펑펑 울었던 일화, 곧 출산을 앞둔 큰언니에게 들려주고 싶단 속내까지. 그때 문득 깨달았다. 아, 이래서 이 친구들을 좋아하나 보다. 음악과 함께할 때 가장 빛나는구나.

그들은 ‘소녀시대’였다.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소녀시대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건 말건 상관없는 분은 ‘시 유 어게인’. 소속사는 10일 멤버인 수영과 티파니, 서현은 재계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앞서 떠난 제시카까지 전체 9명 가운데 4명이 빠지는 셈. 5인조 소녀시대라. 나름 운치야 있겠지만, 기존에 알던 소녀시대는 아니다.

한국 걸그룹의 상징 같던 존재다 보니 국내외 반향도 크다. 태국 등 일부 국가에선 소녀시대 옛 앨범들이 주르륵 순위 차트를 점령하는 일도 벌어졌단다. 한 해외 한류전문 매체는 ‘결별(break up) 소식에 분노에 휩싸인 팬들’을 다룬 기사도 내보냈다. 미국 빌보드는 “10주년 기념앨범을 낸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아 더 충격이 거셌다”고 분석했다.

다만 다들, 하나 주목하지 않는 게 있다. 어쨌든 그들은 10년을 버텼다. 뭐, 억지로 가수 활동했단 얘긴 아니다. 어지간해선 꿈도 못 꿀 돈과 명예도 따랐을 테고. 하지만 이 땅에서 지금까진 어떤 걸그룹도 강산이 바뀌는 걸 누리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데뷔했던 원더걸스도 올해 1월 결국 10주년을 코앞에 두고 해체했으니. 어쩌면 앞으로도 한참은 보지 못할 기록을 소녀시대는 세웠다.

역시 오래 버티는 게 장땡이란 허망한 소린 하고 싶지 않다. 10년이란 시간은 그들을 ‘소녀’라 부르기도 겸연쩍게 만들었다. 처음에야 다들 고교생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 내년이면 서른이다. 그들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와 닿으리라 생각하니…. 세월 참.

“우리만 그런 건 아니지만, 국내 연예계는 여성 뮤지션이 살아남기 쉽지 않은 정글입니다. 특히 아이돌에겐 10대, 많아야 20대 초반 이미지를 유지하길 암묵적으로 강요하죠. 그런데 소녀시대는 뭔가를 뛰어넘었습니다. 사탕발림 애교 부리는 수준을 벗어나 ‘당당한 카리스마’로 승부해 정상을 지켰다고나 할까요. 물론 기획사 전략도 작용했겠지만, 그건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죠.”(아이돌 전문 비평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

이제 소녀시대는 ‘따로 또 같이’ 새로운 길을 간다. 그 앞에 뭐가 있건 한국 걸그룹사(史)는 그들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그 추웠던 날, 리더인 태연은 이렇게 얘기했다. “처음 시작했던 순간을 잊지 말자고 수십 번씩 함께 다짐했어요. (새해에) 무언가 새로 준비하는 분이 많을 텐데, 저희와 힘차게 출발하잔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 바람, 그대로 돌려드린다. 당신들 인생은 이제 막 해가 떠올랐다고.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소녀시대#한국 걸그룹의 상징#해에게서 소녀에게#국내 연예계는 여성 뮤지션이 살아남기 쉽지 않은 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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