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의 북한이야기]납치는 전통적 대외공작

  • 입력 2004년 11월 15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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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것은 북한의 ‘납치 활동’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만큼 ‘납치’에 익숙한 나라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북한에 의한 ‘납치사건’이 빈발했던 지역의 하나가 구소련이다. 소련에 체류하는 북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 1950년대 말 이후 소련은 국가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한 자국민의 사생활을 별로 통제하지 않았다. 북한에서 나온 유학생, 외교관 중에는 이런 ‘수정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김일성 우상화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그런 사람은 즉각 귀국토록 했는데, 귀국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납치란 방법을 동원했다.

1956년 말, 주소련 대사를 지낸 이상조가 소련 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는 그해 봄 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김일성 우상화 정책을 비판해 평양 당국을 격노케 했다. 소련 정부는 한동안 숙고한 뒤 그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일성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57년엔 이상조와 가까웠던 몇몇 북한 유학생들이 귀국 명령을 거부하고 소련에 보호를 요청했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북한 당국은 사건 주동자 허운배의 납치를 시도해 모스크바의 북한대사관까지 끌고 갔으나 허운배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다.

1959년 북한 특무기관은 마침내 납치공작에 성공했다. 모스크바 음대에 유학 중이던 이상구가 개인숭배 정책을 비난해 당국의 미움을 사자 소련에 보호를 요청한 상태였다. 북한은 그해 11월 24일 모스크바 시내에서 그를 납치해 마약을 먹인 상태로 비행기에 실어 평양으로 데려갔다. 이로 인해 소련 정부는 북한 대사를 소환하는 등 외교적 논란이 벌어졌으나 그는 끝내 소련으로 오지 못했다.

1960년대 말부터는 시베리아에 파견된 북한 벌목꾼들 중 작업장을 이탈한 사람들이 납치의 주 대상이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수십 명, 많으면 수백 명의 벌목꾼이 북한 특무기관에 납치됐다.

이처럼 ‘납치’는 북한의 대외공작에서 하나의 ‘전통’이다. 1970년 일본인 납치사건도 그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생활하며 필자가 놀라는 것 중의 하나는 일본은 13∼15명에 불과한 납북 일본인 문제로 대규모 외교적 캠페인을 벌이는 데 반해 한국은 납북 한국인(또는 북한 이탈주민)에 대해 관심이 없는 듯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납북된 한국인만 거의 500명에 이르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납북어부 문제는 비교적 알려져 있지만, 1970년대 말 홍도와 선유도 해안에서 납북된 고교생 등에 대해선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 러시아 일본 등 관계국들간에 자료협조와 국제여론 환기 등 공동 대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드레아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역사학

◇오늘부터 화요일자에 격주로 안드레아 란코프 교수의 ‘란코프의 북한이야기’를 4회에 걸쳐 싣는다. 필자는 1963년 러시아 레닌그라드 출신으로 1989년 레닌그라드국립대에서 한국 및 중국 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1992년 모교의 조교수를 거쳐 1996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올해 9월 국민대 초빙교수로 한국에 왔다. 1984년 김일성종합대에 유학했고, 1992년부터 4년간 대학강사로 한국에도 체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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