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썩어빠진 기득권 계층을 어쩔 것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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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해 고시 붙으면 뭐하나
공직에 앉아 사익 챙기면서도 부패인 줄 모르는 도덕적 마비
법치 유린하는 잘난 지배계급에 ‘헬조선’ 소리 절로 나올 판
“법대로, 살아있는 권력까지”… 김수남 검찰총장 해낼 수 있나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잘났어, 정말”이라는 TV 유행어가 있었다. 의부증에 시달리는 고두심은 주로 남편한테 히스테리를 부리다 말이 막히면 “잘났어, 정말” 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1989년 KBS ‘사랑의 굴레’가 방영되던 그때는 저금리·저환율·저유가로 단군 이래 최대 경제 호황이었다. 드라마 속 남편도 정말 잘나가서 “잘났어”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해 4월 1일 종합주가지수는 1,000을 돌파했고 대학 졸업생들은 어디든 취업이 가능했다.

그때 정말 공부 잘해서 사시, 행시 패스하고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판검사나 관료가 된 사람들의 민낯이 요즘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새파랗게 젊었을 때 “물러나라”고 외쳤던 구악(舊惡) 뺨치는 모습이다. 공직에서 태연하게 사익(私益)을 챙기는 부정부패를 해먹고도 국민은 개돼지로 아는지 그게 무슨 문제냐는 식이어서 더 놀랍다.

2일 밤 구속된 인천지법 김수천 부장판사는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전 대표한테 억대의 뇌물을 받고는 그가 원하는 대로 판결을 해주는 희대의 사법비리를 자행했다. 10년 전에도 부장판사가 구속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브로커 돈을 받고 동료 법관의 재판에 잘 봐달라고 청탁을 한 것이어서 차원이 다르다. 세상이 암만 썩었대도 판사는 법대로 판결해 줄 것이라는 국민의 소박한 믿음, 최후의 기대, 사법정의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다.

더 기함할 일은 보름 전 그의 수뢰 의혹이 나왔을 때 인천지법이 “살펴봤더니 양형 참작 사유를 충분히 고려한 판결이었다”고 감싸고, 대법원에선 “불공정한 재판 결과가 나타났다고 보지 않는다”고 뭉갰다는 사실이다. ‘주식 대박’ 진경준 당시 검사장의 수상한 투자설이 불거졌을 때 “제 돈 가지고 투자한 게 뭐가 문제냐”는 청와대 반응과 거의 비슷한 잘난 사람들의 제 식구 감싸기요, 도덕적 마비다.

4·13총선 전후만 해도 이런 특권 의식은 국회에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행정부, 사법부, 심지어 청와대에도 잘난 사람들의 구린내가 진동한다는 것이 줄줄이 드러났다. 과거 정권에선 이들이 공직자 아니었을 때 관행처럼 퍼졌던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등 ‘청문회 5종 세트’로 지적됐고 상당수가 낙마했지만 박근혜 정부에선 3종 세트 정도는 기본이다. 공부 잘해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이 세금 좀 덜 내겠다고 가족회사에 통신비를 떠넘기고, CJ 햇반 행사에 출몰하면서 CJ가 건설한 빌라에서 파격적 싼값 전세를 살고, 부부가 한 사람은 공정거래위원회를 감사하고 한 사람은 공정거래위원회에 소송하고도 그게 부패인 줄도 몰랐다면 공직사회 타락이 도를 넘었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면 새누리당 집권은 10년으로 끝이라는 얘기가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나온다. 패권주의 친박(친박근혜)을 제외한 대선 주자들은 이미 ‘보수 개혁’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제 월급으로는 굴비 한 마리 안 사 먹는 공직자들의 관존민비(官尊民卑) 근성이 28일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법치에 대한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진 뒤다.

검찰이 자의적으로 기소독점권을 휘두르고, 사법부가 멋대로 판결한다면 김영란법은 끔찍한 흉기가 될지 모른다. 지배계급부터 법과 규칙을 유린해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국민에게는 애국심과 자긍심을 강조하다니 ‘헬조선’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청렴한 복지국가 스웨덴도 1700년대까지는 부패한 나라였다. 이 나라의 개벽은 1793년 왕이 살해되고 1809년 정보공개법을 헌법에 넣는 등 기득권 세력의 특권을 없애고 부패를 척결함으로써 가능했다고 최연혁 스웨덴 스칸디나비아정책연구소장이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적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병역 기피가 만연했던 1960년대 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병역미필자들을 제주도 5·16도로 건설에 투입하는 것으로 병역의 의무를 바로 세웠지만 따님 대통령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지금 기득권 계층의 특권을 제거하고, 법치를 바로잡고, 그리하여 나라에 새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수남 검찰총장이다. 김 총장은 김밥 한 줄 사 들고 홀로 산에 올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제 식구는 물론 살아 있는 권력까지 법대로 수사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것이 김 총장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인천지법 김수천 부장판사#검찰#기득권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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