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원수]미완의 ‘서초동 시대’ 30년 국민 신뢰 되찾는 원년 돼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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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사회부 차장
정원수 사회부 차장
“‘하코방’(상자같이 좁은 방을 뜻하는 일본말) 같은 곳에 있다가 서초동으로 갔는데, 얼마나 사무실이 넓고 좋던지.”

1989년 9월 2일 당시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 판사로 근무하던 황찬현 전 감사원장(65)은 서소문에서 서초동으로 법원 청사를 옮기던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서초동 청사에 대해 ‘경비원 1명이 건물 내부를 순찰하는 데만 9시간씩 걸릴 정도로 웅장한 법원 건물’이라고 보도했다. 서초동 청사는 규모와 시설에서 서소문 청사를 압도했다.

서소문의 서울고검·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청사도 서초동 법원 바로 옆으로 옮겼다. 법원보다 하루 먼저 열린 준공식에서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기념식수를 하고, 방명록에 서명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지금도 서울중앙지검 1층 전시관에 남아 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1995년 10월 서소문의 대법원과 대검찰청까지 서초동으로 옮겨가면서 이른바 ‘서초동 시대’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원년은 1989년이었던 셈이다. 당시 법원과 검찰 청사의 서초동 이전을 놓고, 일제강점기와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서소문에 경성재판소 합동청사가 건립된 이래 법원과 검찰이 함께 51년 동안 서소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선 “국민 세금으로 세운 새 청사에서 ‘권위주의 법치주의’를 ‘민주주의 법치주의’로 탈바꿈시킬 기회를 맞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법원과 검찰이 국민의 큰 기대를 안고 새 출발을 했지만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우선 법원은 사법제도의 근본적인 틀을 바꾸는 개혁에 나섰지만 스스로 주도했다기보다는 외부 요구에 따라간 것이었다. △1993년 대법원 산하 사법발전위원회 △1999년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 △2005년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영장실질심사와 국민참여재판 등이 도입됐다. 또 사법시험이 폐지되면서 2013년부터 미국처럼 3∼15년 이상 경력의 변호사 중에서 법관을 임용하는 제도가 생겼다.

검찰은 ‘검찰권의 독립’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다.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약하다는 이유로 미국식 특별검사 제도가 도입됐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과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으로 한때 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해체됐다. 지금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 논의가 국회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검찰 조직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요즘 법원과 검찰 측에 내년 가을에 있을 ‘청사 이전 30주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준비를 하긴 해야 하는데…”라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현재로선 법원과 검찰 모두 행사를 조용히 치르거나 아예 건너뛸 가능성이 높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 및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로 서초동 법조타운 일대가 어수선한 분위기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행사가 열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법원과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메시지만이라도 발표했으면 좋겠다. ‘서초동 시대’ 들어 법원과 검찰 모두 청와대에서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졌지만 결국 청와대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해 국민의 불신을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원과 검찰이 내년에는 국민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놓고 서로 경쟁하며,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원년이 됐으면 한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서초동 법조타운#서초동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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