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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광영]‘알츠하이머’라는 전두환… 기억에서 탈출할 자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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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광영]‘알츠하이머’라는 전두환… 기억에서 탈출할 자격 있나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입력 2018-09-03 03:00수정 2018-09-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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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2014년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 ‘침묵의 시선’에는 대량 학살 주범들이 47년 전 살해 행위를 몸소 재연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이 1965년 한 해 동안 독재에 저항한 국민 10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을 다루며 당시 주범들을 찾아가 묻는다. “(살해 장소가) 이 숲인가요?” “(피해자는) 어떤 자세였죠?” “칼로 몇 번 찌른 건가요?”

놀랍게도 가해자들은 손짓 발짓 해가며 당시 상황을 충실히 보여준다. 처형단장이었던 70대 노인은 함께 학살에 가담했던 친구까지 대동해 감독 앞에서 역할극을 한다. “잘 봐, 이 친구가 죄인이라고 해 봐. 이렇게 목을 쭉 늘여 빼게 해. 그때 바로 칼로 내려치는 거야. 그러곤 발로 차버려. 강물 속으로.”

당시 희생자의 유가족인 안경사 아디는 감독이 찍어 온 가해자 인터뷰 영상을 담담히 바라본다. 아디는 영상 속 가해자들을 한 명씩 찾아가 안경을 맞춰준다. 이 다큐멘터리의 백미는 아디가 이들의 시력을 재던 중 불쑥 학살자 유가족 신분임을 밝히는 순간이다. 의기양양했던 이들은 당황한 듯 눈의 동공이 흔들린다. 이가 다 빠져버린 입은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쉼 없이 씰룩거린다. 아디는 “학살자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던 것은 사람을 죽인 게 후회되고 죄책감이 느껴져 그런 것 같다”고 독백한다.

학살자들은 사건 이후 처벌은커녕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죄책감만은 피하지 못한 듯했다. 47년 전 그날을 하나하나 재연할 만큼 자신이 한 짓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의 죄책감이 옅어지지 않도록 집요하게 기억을 상기시키는 게 아디의 복수 방식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87)은 얼마 전 광주지법 재판에 불출석하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유를 댔다. 알츠하이머는 기억력이 약화돼 치매로 이어지는 병이다. ‘지난해 회고록을 낸 사람이 알츠하이머를 앓아 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진위 논란은 둘째 치고, 그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비극’이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그는 가해의 기억에서 탈출할 자격을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발포 경위 등 그가 보다 소상히 밝혀야 할 진실이 여전히 많다.

전 전 대통령이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81년 중학교 교사 주영형이 1학년 제자를 유괴해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도박 빚 1000만 원을 갚기 위해서였다. 사형이 확정된 주영형은 감옥에서 기독교에 귀의해 교수대에 오르기 전 “하나님 품에 안겨 평온한 마음으로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용서도 받지 않은 채 가해의 기억을 구원의 기억으로 바꿔버린 사례였다. 이 부조리에서 모티브를 딴 이청준 소설 ‘벌레 이야기’가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전 전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면 그 역시 국민의 용서가 없는 상황에서 가해의 기억으로부터 무단 해방되는 셈이 된다.

다만 그는 죄책감을 가질 만한 가해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회고록에서 ‘나의 대통령 취임은 시대의 요청이었다. 나의 회고록은 참회록이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뒷공론을 개의치 않으련다’라고 썼다. 5·18 당시 군 발포에 대해선 ‘군인 개개인의 정당방위였을 뿐 사격 명령은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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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올 2월 결의한 ‘5·18진상규명특별위원회’가 이달 출범한다. 그동안 5번의 정부 조사에도 발포 명령자 등 핵심 사안은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 사건 후 38년이 지나 관련자들의 기억도 사라지고 있다. 전 전 대통령에게는 진실을 말할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알츠하이머 발병 같은 안타까운 소식에 진정 위로를 받으려면 말이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전두환#알츠하이머#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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