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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형준]“파업도, 구조조정도 안돼”… 40년 중공업 산증인의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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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형준]“파업도, 구조조정도 안돼”… 40년 중공업 산증인의 당부

박형준 산업1부 차장 입력 2018-08-31 03:00수정 2018-08-3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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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산업1부 차장
그는 가난했다. 부산에서 보낸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날품팔이를 했고, 어머니는 노점 행상을 했다. 배불리 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합창부에 들어갔지만 단복을 살 돈이 없어 친구에게 빌려 입었다. 하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10리 길을 메뚜기를 잡으며 즐겁게 걸어 다녔다.

1973년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부산 공공직업훈련소에서 기술을 배웠다. 1970년대 기능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대접받았다. 적어도 밥은 굶지 않을 수 있었다.

1977년 기능공으로 울산의 현대조선소 협력회사에 입사했고 이듬해 현대중공업에 지원했다. 면접에서 “화려한 이력도, 뛰어난 영어 실력도, 명문대 졸업장도 없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을 대한민국 최고의 회사로 만들기 위해 목숨 걸고 일하겠다”고 말했다. 결과는 합격.

신입이지만 경력이 있어 작업조장을 맡았다. 12명의 조원과 함께 당시 세계 최대의 역사(役事)였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지역 산업항구 제작 작업에 투입됐다. 공사 금액은 한국 예산의 25%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 이후 그의 삶은 현대중공업의 성장, 나아가 한국 조선업의 드라마틱한 성장과 함께 비상했다.

세계 조선업은 1980, 90년대 극심한 불황에 빠졌지만 현대중공업은 ‘대규모 설비 확장’이라는 역발상을 했다. 선박 수명이 약 25년인 점을 감안하면 2000년 전후로 다시 호황이 올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계획은 적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발주량이 늘며 현대중공업은 날개를 달았다. 한때 초강경 전투노조였던 노조도 회사에 힘을 보탰다. 1995년부터 19년간 한 차례도 파업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측과 함께 수주에 나섰다.

2008년 조선산업 수출액은 431억 달러를 기록하며 자동차, 반도체를 제치고 처음으로 수출 1위를 했다. 그해 현대중공업은 선박 102척을 건조해 세계 20개국에 수출하는 등 전체 매출액의 절반가량을 조선 분야에서 거둬들였다. 최대 호황이었다.

하지만 호시절은 그때로 끝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선박 발주가 급감했다. 게다가 중국은 저가 선박 발주를 싹쓸이해 갔다. 회사는 살아남기 위해 직원들의 임금을 깎고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협력적이었던 노조는 2016년 말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로 복귀하며 다시 강성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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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현대중공업 노사는 대치 중이다. 최근 현대중공업 노조는 회사 측의 희망퇴직 시행에 반발해 부분 파업을 실시했다. 회사로선 해양플랜트 일감이 제로(0)인 상태여서 유휴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의 성쇠를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고윤열 가공소조립 5부 기감(사무직으로 치면 차장급)이다. 올해 만 60세여서 연말에 정년퇴직을 한다. 젊음을 바쳐 40년을 근무한 직장을 떠나는 그에게 ‘남아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지금은 회사도 힘들고, 노동자도 힘들다. 일감은 없는데 노동자는 많으니 희망퇴직 받는 회사 처지도 이해가 가고, 머리띠를 두르고 파업을 하는 후배도 이해가 간다. 지금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야기할 때다. 회사는 인력 구조조정만큼은 최대한 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는 세계 일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온몸을 바쳐야 한다. 다시 호경기가 왔을 때 비상할 수 있도록 다 같이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박형준 산업1부 차장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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