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수정]탁월한 아이디어 샘솟게 하는 휴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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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정 산업2부 차장
신수정 산업2부 차장
“한국인은 휴가를 꺼린다.”

2011년 7월 파이낸셜타임스(FT)에는 한국의 휴가문화를 다룬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은 “한국의 연평균 휴가기간은 11일에 불과하고 그나마 대부분 단기로 나눠서 사용한다. 휴가보다는 보너스 급여나 ‘근면하다’는 직장 내 평판을 택한다”고 지적했다.

2018년 현재, 휴가를 반납해가며 업무에 몰입하는 자세를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 듯하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 강하게 불고 있는 ‘워라밸(일과 일상의 균형)’ 바람과 7월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 영향인지 최근에는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휴가를 떠나는 직장인이 많다.

삼성, SK, LG, 두산 등 국내 주요 기업들도 직원들이 자유롭게 휴가를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한 번에 2주일까지 집중적으로 쓰도록 하는 곳도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장기 휴가를 내서 여행을 떠나거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재충전을 통해 이후에 근무 성과를 높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존의 틀을 깨는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일상의 반복적 업무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멈추고 머리를 비워야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성찰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미국의 면역학자 조너스 소크 박사는 수년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딘가에서 막힌 실험에 진전이 없자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2주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에서 높은 천장을 바라보던 그에게 불현듯 결정적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 세계 수많은 아이들을 소아마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 백신은 연구실이 아닌 옛 성당에서 탄생했다.

최근엔 국내 대기업뿐 아니라 휴가를 중시하는 중소·중견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제약업체인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올해 연간 휴무일을 공지해 직원들이 여유 있게 휴가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1932년 창립 이래 처음으로 연말 휴가도 도입해 12월 25일부터 내년 1월 1일까지 8일을 쉬게 했다.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여가친화기업 중 하나인 ㈜성도GL은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휴가 일수를 채우지 않으면 승진 대상자에서 누락한다. 무조건 휴가를 가란 뜻이다.

몇 년 사이에 빠르게 바뀌고 있지만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한국 근로자들의 휴가 사용 일수는 저조한 편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은 1년에 평균 14.2일의 연차휴가 중에서 60%가량만 사용한다. 근로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 연간 평균 2069시간이나 된다.

6월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근로시간 단축 시대를 맞아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가이드를 내놓으면서 “양(量) 중심의 근로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휴가 활성화를 위해 상사부터 솔선해서 휴가를 가도록 하고 연간 휴가 사용 현황도 주기적으로 점검하라고 제안했다.

‘바캉스(vacance)’는 ‘텅 비어 있다’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무엇이든 일단 비워야 새것으로 꽉 채울 수 있다. 개인과 조직의 미래를 바꿀 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비움의 과정을 거쳐야 나올 수 있다. 7월 말∼8월 초 휴가 시즌이다. 고민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가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신수정 산업2부 차장 crystal@donga.com
#휴가#워라밸#주 52시간 근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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