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승옥]‘두 얼굴’의 한국 축구팀… 투혼이 아니라 과학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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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배너 박사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조사하다가 감마선에 노출된다. 이후 ‘위급한 상황’이 되면 헐크로 변신했고, 악당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1970년대 미국 드라마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 나선 태극전사들도 두 개의 얼굴을 보여줬다. 첫 경기였던 스웨덴전에서는 약골 배너 박사의 모습이었고, 마지막 독일전에선 근육질의 헐크였다. 내리 2패로 조별 예선 탈락이 유력해 국민적 분노가 곧 폭발하려던 위급 상황이었다.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우리 선수들은 왜 그렇게 달라졌을까. 분명 우연은 아닐 테고, 우리 축구 안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답은 현장에 있었다. 선수들의 말 속에 있었다. 이재성은 “스웨덴전에선 체력이 부족해 공격이 안 됐다”고 했다. 구자철은 “소집된 뒤 한 달가량 휴식이 없어 선수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고 밝혔다. 체력 관리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트레이닝 전문가들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운동생리학의 ‘주기화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대표팀이 지난달 5일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장에서 실시한 고강도 체력 훈련이 특히 문제였다는 지적이 눈길을 끌었다.

고강도 체력 훈련의 개념은 간단하다. 지옥 훈련으로 선수들의 에너지를 1%도 남김없이 방전시키고, 이후 휴식과 간단한 기술 훈련을 하면서 에너지가 다시 고이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실전을 3주 정도는 앞두고 실시한다. 3주가 돼야 에너지가 100% 차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표팀은 당시 불과 열흘 정도 뒤에 예정된 스웨덴전(6월 18일)에서의 100% 컨디션을 목표로 고강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택일이 잘못됐던 것이다. 목표로 했던 100% 컨디션은 주기화 이론대로 3주 정도 지난 27일 독일전에서 이뤄졌다. 독일전에서 대표팀이 뛴 거리는 무려 118km. 스웨덴전보다 15km나 더 많았다. 그리고 경기 끝까지 힘이 있었다.

이번에 외국인 전문 코치가 우리 선수들의 체력을 관리했다. 그가 날짜를 잘못 잡았거나, 신태용 감독이 무지했거나, 알았더라도 조급함에 훈련을 강행했을 수 있다. 당시 대표팀 코치진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장비를 이용해 선수들의 체력 수준을 파악했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신 감독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 대표팀은 월드컵 개막을 한 달 앞두고 소집됐다. 여러모로 시간이 빠듯했다. 누군가 감독을 지원했어야 했다. 축구협회 시스템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트레이닝 전문가는 “대표팀에 합류한 해외파와 국내파의 체력 수준이 다 달랐을 것이다. 결국 협회가 대표팀 소집 이전에 선수들의 체력 수준을 파악해서 처방을 했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우리는 손쉽게 선수의 정신력 탓을 한다. 플레이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투혼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책이 나오거나 부상이 생기는 등의 문제는 대부분 체력 저하에서 비롯된다. 체력에서 기술이 나오고, 전술이 나온다.

아시아경기가 8월이다. 손흥민이 출전한다. 손흥민의 소속팀 토트넘은 이달 말부터 프리시즌 일정에 돌입한다. 손흥민의 컨디션 관리는 소속팀에만 맡길 수가 없다. 상황과 여건에 따른 선수 개인별 체력 관리 시스템, 일단 손흥민부터 시작해볼 일이다. 금메달은 거기에 달렸다. 더 이상 투혼만 얘기하지 말자. 현대 축구는 시스템이고, 과학이다.
 
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touch@donga.com
#러시아 월드컵#축구 대표팀#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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