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그놈 구속영장 꺾인 날, 피해자는 집에 구속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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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A는 남자친구 배웅을 받으며 귀가하는 한 여성의 뒤를 밟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여성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서던 순간을 A는 놓치지 않았다. 같은 동 주민인 듯 남자친구를 스쳐 지나 여성을 따라갔다. 집 안에 들어선 여성은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문틈으로 낯선 손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불 꺼진 집에서 여성은 A와 맞닥뜨렸다. 처음 보는 남성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아는 듯 A는 망설임 없이 여성을 추행했다. 집 밖까지 울려 퍼진 피해자의 비명소리에 남자친구가 발길을 멈췄다. 밖으로 나온 A는 남자친구의 얼굴을 힐끗 본 뒤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폐쇄회로(CC)TV에 찍힌 A는 숙련된 도주자였다. 도망치면서 옷을 여러 번 갈아입었다. CCTV마다 모습이 제각각이었다. 집으로 곧장 가지도 않았다. 동네 주변을 3km 넘게 빙빙 돌았다. 자기 집을 코앞에 두고 여러 이웃집을 서성였다. 형사들은 동선을 추적하려 CCTV 100여 개를 몇 번씩 돌려봤다. 한 달 넘게 걸려 찾은 A의 집은 피해자 집에서 불과 몇십 미터 거리였다.

피해자는 형사들과 CCTV를 살펴보다 경악했다. 화면 속 A는 피해자와 같은 길로 출퇴근했다. A의 시야에 아침저녁으로 노출돼 있었다. 조사 결과 A는 성추행 전력으로 신상정보등록 대상자였다. ‘등록’된 성범죄자 신분으로 퇴근길 여성을 뒤따라가 몸을 만진 적도 있다. A는 동네 여성을 덮쳤고, 동네에 남아 또 다른 동네 여성을 노렸다.

범인의 정체를 알고 나자 공포는 더 커졌다. 남자친구의 ‘출퇴근 경호’가 시작됐다. 어느 날 피해자가 버스에 오르는 A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피해자는 버스 앞에서 남자친구 팔을 잡고 몸을 덜덜 떨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피해자는 A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잠시 안심했다. 하지만 며칠 뒤 형사의 전화를 받자마자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았다. ‘무조건 빨리 처분’ 조건으로 살던 집을 내놨다. 그날 법원이 A에 대해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석방시켰기 때문이다. ‘범행을 반성하고 있고, 증거가 수집돼 있어 인멸될 우려가 없으며, 직업과 주거가 일정해 도주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경찰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하던 A가 영장전담판사 앞에선 시인한 모양이었다.

A는 이후 경찰 조사에서 갑자기 ‘음주 감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당시 술에 취해 기억은 없지만 피해자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야간주거침입 강제추행은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는데 정상 참작이 되면 3년 이하 형이 선고돼 집행유예도 가능하다고 기대하는 듯했다.

A는 한 회사에 장기 근속한 직장인이다. 현재 집에서도 가족들과 오래 살았다. 법원이 구속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한 주요 근거였다. 하지만 A의 ‘일정한 주거’와 범행 후에도 이어지는 출퇴근 ‘동행’ 탓에 정작 피해자는 집에 ‘구속’됐다. 그녀는 이제 ‘현관 앞에 왔다’는 남자친구의 문자를 봐야만 문을 열 수 있다. 밖에 나가 쓰레기 분리 배출을 하지 못해 베란다에 쌓아둔다. 구속을 피한 범죄자가 피해자를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다는 보도를 본 날에는 밤새 불을 켜둔다. 버튼만 누르면 112 신고가 되는 스마트 워치를 차고 있지만 A가 마음먹고 보복에 나서면 별 소용이 없다.

피해자는 집에서 ‘석방’되기 위해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다. A가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는 범행 장소일 뿐이다. 피해자가 외딴 곳으로 숨어버리거나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포기한다면 이 사건의 ‘살아있는 증거’는 사라진다.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보다 치명적인 증거 인멸이 또 있을까.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피해자#구속#음주 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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