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승옥]이승엽과 임효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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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임효준(쇼트트랙)은 ‘국민타자’ 이승엽의 팬이었고, 그를 롤모델 삼아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겼다. 그런데 많고 많은 선수 중에 왜 이승엽이었을까. 이승엽의 어떤 점이 허리뼈까지 부러졌던 임효준을 다시 일으켜 세웠을까. 임효준의 금메달 레이스를 보면서 이승엽이 남긴 메시지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과거 취재 현장에서 여러 번 느꼈지만, 이승엽은 수더분하게 생긴 것과 달리 일 욕심이 정말 많았다. 이승엽은 1997년 21세에 홈런왕에 올랐고, 그 2년 뒤 홈런 54개로 국내 야구 첫 50홈런 기록을 썼다. 오른 다리를 들고 치는 이른바 ‘외다리 타법’이 이승엽의 몸에 최적화됐던 것이다. 보통 선수 같으면 여기서 멈춘다.

그런데, 이듬해 2010년 새로운 타격 폼을 들고 나왔다. 오른 다리를 내렸다. ‘다리 하나 차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타격 폼 수정은 인생을 건 모험이다. 사실 성공 패턴은 누구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팀 선배였던 양준혁이 “너무 놀랐다”고 할 정도로 파격이었다. 일본 왕정치(오 사다하루)가 보유하고 있던 아시아 최고 기록(55개)을 깨기 위한 승부수였다. 2003년 아시아 신기록(56개)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승엽은 야구장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선수였다. 어릴 때도 그랬고,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슬럼프에 빠지면, 답을 찾을 때까지 집에 가지 않고 배트를 휘둘렀다. 강한 정신력으로 손가락, 무릎 수술도 잘 이겨냈다. 몸 관리를 위해 탄산음료도 마시지 않았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좌우명은 실천 속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연습벌레는 아니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좋아하는 일이라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즐기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노력이었다. 고통스럽지만, 즐겼다.

이승엽은 약관에 정상에 선, 이른바 ‘소년 급제’를 한 경우였다. 소년 급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계한다. 조기 출세 탓에 오만하고, 삐뚤어진다는 것이다. 이승엽은 홈런을 치고 열광한 적이 별로 없다. 고개를 숙이고 덤덤하게 달려 나갔다. 뼈아픈 홈런을 허용한 상대 투수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이춘광 씨가 아들에 대해 가장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부분이다. “어려서 ‘사람부터 돼라’ 교육했다”고 그는 만날 때마다 말했다.

임효준은 이런 이승엽을 보고 자신을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차세대 주자였다. 겨울유스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가 15세였지만, 이후 지독한 부상과 싸워야 했다. 모두 7번의 수술을 받았고, 2년 전 허리 골절 수술은 치명적이었다. “쇼트트랙 하다가 죽겠구나 싶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 과정을 이겨냈으니,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과 싸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두운 밤길을 헤맬 때 그는 이승엽을 떠올렸을 것이다. 임효준이 금메달 수상 인터뷰 때 “진심으로 동료들과 함께 땄다고 생각한다”는 대목에선, 후배 투수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이승엽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이승엽의 삶이 임효준에게 영향을 미쳤듯, 이번 임효준의 스토리는 다른 선수들에게 꿈을 안겼을 것이다. 또 여러모로 힘든 우리 국민들에게도 큰 힘을 줬을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 많은 세상이다. 그래도 임효준 같은 스토리가 있어 위안도 받고, 용기도 얻는다. 대표팀 김선태 감독이 금메달이 결정되는 순간, 임효준을 끌어안으면서 했다는 한마디, 참 와닿는다.

“그것 봐. 되잖아.”
 
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touch@donga.com
#쇼트트랙 임효준#평창 겨울올림픽#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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