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부끄러움은 우리 몫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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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몇 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한 기업에서 후배 A를 성적으로 괴롭힌 일로 중징계를 받은 B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평소 사람 좋고 점잖은 C가 B를 적극적으로 두둔했다. “A는 선배 B가 징계를 받던 날에도 사무실에서 너무 밝게 웃고 떠들고 있더라. A는 평범한 애는 아닌 거 같아. 그런 후배한테 걸린 B가 불쌍해.”

사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 회사에서 A와 B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단지 C가 이미 징계를 받은 가해자 B를 편드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형, 다른 데 가서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요즘 분위기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형도 문제가 될 수 있어요”라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잊고 지냈던 그날의 대화를 다시 떠올린 건 창원지검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폭로 사건을 취재하면서다.

서 검사의 폭로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의문은 ‘8년 전 사건을 왜 지금 와서 폭로하는가’였다.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전 검찰국장은 사건 당시에는 검사장이 아닌 법무부 정책기획단 단장이었다. 그 당시도 잘나가는 검사였던 건 맞지만 서 검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안 전 국장은 지난해 4월 터진 ‘돈 봉투 만찬’으로 진즉 해임까지 당했다. 객관적 상황으로 볼 때 서 검사에게는 여러 차례 문제 제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흐른 데다 안 전 국장이 검찰을 떠나버려서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물론 감찰이나 징계도 어렵다. ‘폭로 시점이 왜 지금이냐’, ‘서 검사가 바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커졌다.

평소 친하게 지내온 여검사에게 물었다. 남자 상사의 성추행 등 비위를 덮어주려는 잘못된 조직 문화가 검찰 내에 있는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폭로 배경이 있는지. 여검사가 답답하다는 듯 답했다. “설마 성추행이 검찰의 조직 문화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우리보다 훨씬 문화가 자유로운 미국에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일어났잖아요.”

아차 하는 생각에 서 검사가 출연한 방송 인터뷰 내용을 다시 찾아봤다. 답은 거기 있었다. 서 검사는 “사실 제가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거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닌가.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다’라는 자책감에 괴로움이 컸다”고 말했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또 다른 전직 여검사도 오래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폭로하고 나섰다. 그는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검찰에 근무할 때 한 고위 간부가 혼자 사는 관사에 자신을 부르는가 하면 호텔 일식당에서 개인적 만남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 일로 결국 검찰을 떠났다고 한다.

서 검사 같은 이들의 폭로가 늦어진 건, 성폭력 피해자가 스스로를 부끄럽다고 여기고 피해 사실을 밝히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든 우리 잘못이다.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무언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무책임한 수군거림과, 그런 이야기를 별것 아닌 듯 흘려 넘겨온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 부끄러움은 알게 모르게 서 검사와 성폭력 피해자들의 침묵을 강요해온 우리의 몫이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서지현 검사#성추행 피해 폭로 사건#안태근 전 검찰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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