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인찬]알맹이 빠진 남북대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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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정치부 차장
황인찬 정치부 차장
지난해 말 서울 종로구의 한 중식당. 유독 높은 천장 때문인지, 꽁꽁 언 남북관계 때문인지 통일부 출입기자단의 송년회는 썰렁했다. “다음엔 평양에서” “금강산 가자”라는 건배사들이 드문드문 튀어나왔다. 허나 남북 대화가 전면 중단된 현실 앞에선 공허할 뿐이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새해엔 분위기가 전환될 수도 있다. 김정은의 신년사가 중요하다”고 덕담 같은 얘기를 꺼냈지만 희망사항처럼 들렸다. 그렇게 송년회는 끝났다.

그런데 새해 아침이 되니 세상이 바뀌었다. 새해 첫날 오전 9시 반,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 이후다. “남조선에서 머지않아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경기대회에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우리 정부가 얼마나 기다렸던 한마디였던가. 물꼬가 뚫리자 대화의 물결은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판문점 연락채널이 복원됐고, 남북이 17일까지 판문점에서 3번 만났으며, 역대급 규모의 북측 대표단이 평창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불과 보름여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급격한 화해 국면을 지켜보면서 불안감도 들었다. 특히 고위급 회담과 실무접촉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북측은 잘 준비된, 짜인 각본대로 연출하는 반면에 우리는 북의 돌발 제안을 충분한 검토 없이 수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9일 고위급 회담 오전 회의를 마치고 정부가 북측 ‘참관단’의 평창행을 공개한 뒤 한동안 “참관단이라고 하니 북한 일반 주민이 오는 것이냐”는 기대가 돌았다. 정부는 만 하루가 지나서야 “참관단은 체육 관계자”라고 말을 고쳤다. 15일 실무접촉 후 정부는 “북측의 삼지연 관현악단이 예술단으로 온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명칭의 악단은 북한 매체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비슷한 이름의 ‘삼지연 악단’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답하지 못한 정부는 급기야 “북측이 설명하지 않았다. 악단장으로 누가 올지 모른다”고도 했다. 정체도 불분명한 악단의 방남(訪南)을 수용한 셈이다.

북한은 ‘4 대 4’로 만나기로 했던 15일 실무접촉에서 은근슬쩍 한 명을 더 끼워 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현송월이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로 보이는 클러치백을 도도하게 회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도 북이 대화에서 우위를 차지했다는 여유와 자신감으로까지 읽힌다. 아무리 남북 대화와 평창 올림픽이 중요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북은 요구하고 우리는 수용하는 일방적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우리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비핵화나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북한이 핏대를 세우자 협상 테이블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다. 이게 우리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도 인내하며 기다렸던 남북 대화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일단 남북관계를 개선한 뒤 비핵화 등을 논의하겠다”는 게 현재의 정부 입장이다. 하지만 평창은 북한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우리는 평화롭게 치러야 하지만 북한에 평창은 막말로 ‘화장실’ 같은 곳일 수도 있다. 들고 날 때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국면 전환에 성공하고, 평창 올림픽 기간 동안 핵 고도화를 진전시켰다는 판단을 할 경우 북한은 또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최근 잦은 만남은 ‘착시’일 수도 있다. 당장 비핵화 해법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당당히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자세라도 보여야 한다. 어렵다고 뒤로 물리고, 피해 가기만 한다면 북한과 비핵화를 논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영영 사라질 수 있다. 결국 남북대화의 ‘알맹이’는 비핵화다.

황인찬 정치부 차장 hic@donga.com
#조명균#통일부#남북대화#현송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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