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여자의 적은 여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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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여자 상사와 남자 상사 중 누구랑 일할 때 더 편한가요? 전 같은 여자보다 남자 상사가 더 편하네요.”

“저도 홍일점으로 일할 때가 좋았어요. 여자는 시기 질투가 너무 심해요.”

“상사든 부하 직원이든 여자랑 일하는 게 더 피곤해요. 저도 여자지만 여자들이 더 무섭습니다.”

‘여자 상사’를 주제로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들이다. 가끔 “멋진 여자 사수도 많다”는 반론이 제기되지만 여자 상사 논쟁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일방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여자의 적은 진짜 여자임을 실증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논문 제목도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상사 성별이 여성 근로자의 노동시장 성과에 미치는 영향 분석’이다. 정한나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이 최근 발표한 이 논문에 따르면 직속 상사가 여성인 경우 여성 근로자의 직장 내 스트레스 정도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자 상사는 사원과 대리직급 여직원들의 승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연구자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7년부터 100명 이상 기업에 근무하는 대리급 이상 여성 2361명과 남성 1017명을 추적 조사한 자료를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같은 자료를 토대로 지난해 발표된 또 다른 논문에서는 상위 직급의 승진(차장→부장, 부장→임원)에서도 상사가 여성일 경우 여성 부하직원들이 남성에 비해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직원들은 여성 상사를 만나면 승진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여직원은 여성 상사가 승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황성수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 ‘남녀 관리자의 승진 요인 분석: 승진에 미치는 변인의 성별 차이를 중심으로’).

여자들이 여자 상사 밑에서 승진하기 힘든 이유를 연구자들은 ‘여왕벌 신드롬’으로 설명한다. 여왕벌 신드롬의 사전적 의미는 조직에서 인정받는 여성은 나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성향이다. ‘유리천장’을 깨고 고위직에 오른 유능한 여성들은 부하 여직원들에게도 그만큼 까다로운 평가 기준을 적용한다.

남성 위주의 조직에서 힘겹게 승진의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여성들은 경쟁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남성적 리더십을 생존술로 몸에 익힌다. 여직원들은 고위직에 있는 여자 선배가 조직 문화를 여성 친화적으로 바꿔주길 기대하지만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여자 선배를 보고 실망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황 부연구위원은 “소수로서 눈에 쉽게 띄어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여성 관리자는 열등한 가치인 여성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여성들을 대변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니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결론짓기 전에 ‘원인의 원인’을 따져보자. 여자들이 여자 상사 밑에서 스트레스받고 승진도 못 하는 이유가 여왕벌의 권력 독점욕 때문이라면, 여왕벌은 왜 그런 독점욕을 갖게 됐을까. 왜 우리 여자 상사는 군대 갔다 온 남자보다 더 무섭게 군대식으로 부서를 운영할까.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가 지난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발표한 유리천장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대상 29개 국가 중 꼴찌였다. 여왕벌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다. 남녀 간 임금 격차를 줄이고, 승진의 기회를 고르게 부여하며, 관계지향적인 여성 리더십이 존중받는 기업 문화를 만들면 ‘이 벌집의 여왕벌은 나 하나’라는 여왕벌 현상도 사라질 것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여자 상사#여자의 적은 여자#멋진 여자 사수#여왕벌 신드롬#유리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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