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원재]미슐랭 라멘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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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도쿄 특파원
장원재 도쿄 특파원
“오전 11시에 다시 오세요.”

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반. 문을 열자 주인이 무심히 대기표를 건넸다. 근처 커피숍에서 신문을 보다 오전 11시에 가자 열댓 명이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절반은 외국인이었다. 한 시간 더 줄을 서 기다렸다.

지난주 갑자기 쉬게 된 날, 가보고 싶던 도쿄(東京) 스가모(巢鴨)역 인근 라멘(라면)집을 찾았다. 라멘 팬의 성지로 꼽히는 ‘쓰타(조·담쟁이덩굴)’. 세계 최고 권위의 미슐랭 가이드가 115년 역사에서 처음 별을 준 일본 라멘집이다. 2년 연속 별을 받았지만 주인은 카운터 9석뿐인 식당을 1석도 늘리지 않았다. 1000엔(약 1만 원) 안팎으로 미슐랭 스타 요리를 즐길 수 있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대표 메뉴인 ‘쇼유(간장) 소바’에 반숙 계란을 추가했다. 가격은 1100엔(약 1만1000원). 라멘치고 다소 비싼 편이었지만 국물을 먹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감칠맛에 향긋함이 더해진 절묘한 밸런스. 육수에는 와카야마(和歌山)현 삼나무통에서 2년 숙성한 간장 등 3종류의 간장을 블렌딩했고 명품 토종닭 3종에 조개 다시마 야채 등으로 풍미를 더했다고 했다. 그 위에 최고급 이탈리아산 송로버섯(트러플) 오일을 뿌렸다. 레드와인에 절인 스페인산 이베리코 돼지고기는 잡내가 전혀 안 났다. 명품 밀가루 3종을 혼합해 만들었다는 면도 탄력과 강도가 적당했다. 반숙 계란은 아오모리(靑森) 토종닭의 유정란이었다.

테이블 위엔 일본 라멘 식당에 흔히 놓인 마늘 후추 등 양념이 전혀 없었다. 최적의 상태로 서빙한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혼신의 한 그릇’이라는 메뉴판 설명이 과장이 아니었다. 원목 테이블로 장식된 실내에는 재즈 음악이 잔잔히 흘렀다.

그저 라면 한 그릇일 뿐인데,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인 오니시 유키(大西祐貴) 씨의 블로그 제목은 ‘생애 라멘과의 단판 승부’다. 의류회사를 다니다 5년 전 식당을 차린 그는 “라멘이야말로 일본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신념으로 메뉴 개발에 매달렸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예술품에 가깝다’고 경탄하는 한 그릇의 라멘을 완성했다. 그의 바람대로 쓰타는 싱가포르, 대만에 지점을 내며 세계에 일본 라멘을 알리고 있다.

근대화 시기 차이나타운에서 유래했다는 라멘은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중음식 중 하나다. 쇼유 미소(된장) 시오(소금) 돈코쓰 등 종류도 다양하고 소스에 찍어 먹는 쓰케멘, 기름장에 비벼 먹는 아부라소바 등 먹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지역마다 특색을 갖춘 라멘이 있다.

전후 끼니를 때우는 싸구려 음식으로 보급했지만 장인정신을 갖고 매달린 이들은 라멘을 제대로 된 요리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라멘의 신’으로 불렸던 야마기시 가즈오(山岸一雄) 다이쇼켄 창업자는 부인을 잃고 다리를 절면서도 “라멘은 내 인생 전부”라며 70대까지 주방에 섰다. 그런 열정들이 모여 미슐랭 별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미슐랭 가이드 일본판에는 라멘 섹션이 별도로 있다. 올해 판에는 쓰타를 포함해 두 곳이 별을 달았고 미슐랭 예비군이라고 할 ‘비브 구르망’(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에 27곳이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에서 라멘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한국인의 솔 푸드인 떡볶이, 수제비, 칼국수가 일본 라멘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식당을 나오면서 인생을 걸고 만드는 이들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도쿄 라멘집#쓰타#미슐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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