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길진균]참을 수 없는 ‘당론’의 가벼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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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균 정치부 차장
길진균 정치부 차장
“우리라고 방송 장악 유혹이 없을까…. 권력을 잡은 세력이 언론이나 방송을 장악하려는 낡은 질서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비장해 보였다. 5·9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2월 말.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 12명은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나흘 동안 릴레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민주당 등 야 3당 의원 162명이 공동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 처리를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을 규탄했다. ‘언론장악 방지법 처리’ ‘공영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등의 팻말이 걸렸다.

개정안의 핵심은 KBS, MBC 등 공영방송 사장 선임에 이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는 ‘특별다수제’ 도입이었다. 청와대와 여당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낙하산 인사를 떨어뜨리는 것을 막자는 취지였다. 민주당은 19대 국회 때인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에도 ‘특별다수제’ 도입을 정부조직법 처리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는 제1야당 민주당의 숙원이었다.

당시는 문재인 정부 출범이 눈앞에 있던 시점이었다. “혹시 집권하고 나면 생각이 바뀌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방송법 개정은 당론이다. 잘못된 관행을 우리가 끊어내자는 것이다.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지만 그런 유혹을 이젠 과감히 끊어내야 한다. 믿어도 된다.”(당시 미방위 민주당 간사 박홍근 의원)

그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방통위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만약 이 법(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어느 쪽으로도 비토(거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선임되지 않겠나.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했다는 기사가 25일 오전 보도됐다.

마침 그날은 민주당이 세종시에서 워크숍을 열고 문재인 정부의 첫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각종 법안과 원내 전략에 대한 토론회를 열기로 예정돼 있던 날이다.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 대한 의원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당일 저녁 토론회 직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미방위의 후신) 간사 신경민 의원은 기자들에게 “대통령 발언 취지에 따라 더 논의를 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며 “정권교체라는 상황 변화에 맞춰서 가미할 안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당론을 수정할 수 있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비판 여론이 일자 민주당 의원들은 “당론 재검토가 아니라 더 좋은 안이 있을지 정부와 협의해 보겠다는 취지”라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누구나 ‘눈 가리고 아웅’식 변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민주당 의원은 “19, 20대 국회에서 셀 수도 없는 공청회, 토론회, 각 당 간의 협의 등을 거쳐 가까스로 가장 합리적이라는 개정안을 만들어 냈는데 정기국회가 며칠이나 남았다고 더 좋은 안을 만들겠다는 건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회의원을 헌법기관이라고 부른다. 한 명 한 명의 의원을 각각의 헌법기관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그들의 자율성과 판단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헌법정신을 담고 있다. 심지어 당론은 당 소속 의원 전원이 국민과 맺은 약속이다. 민주당은 소신과 신념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 바꿨던 과거 정치권의 행태를 ‘적폐’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야 공수 교대 후 거리낌 없이 내보이는 말 바꾸기 행태를 모아 백서를 만들어야 할 판이다. 이들이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해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헌법 제46조 2항을 알고는 있는지 궁금하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특별다수제 도입#방송법 개정#공영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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